저 멀리 수평선께로 보이는 지중해는 짙은 남빛이다. 지중해는 육지쪽으로 흘러 오면서 시나브로 그 색이 엷어진다. 그렇게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칸’ 해변에 와 닿은 바다는 투명한 에메랄드 빛깔이다. 해변에 닿은 바다는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한 차례 소리를 낸 뒤에서야 비로소 백사장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지중해를 타고 온 청량한 바람이 ‘크로와 젯’ 거리 곳곳에 솟아오른 ‘종려나무’를 핥고 지나간다. 분수처럼 사방으로 잎줄기를 내뻗고 있는 종려나무의 가늘고 긴 잎새들이 우수수 몸을 턴다. 기자에게 제56회 칸 국제영화제는 ‘황금종려’가 아닌 ‘푸른종려’의 이미지로 처음 다가왔다.
‘팔레 드 페스티벌’ 건물 안에 있는 ‘뤼미에르 대극장’. 무거워 보이는 커튼이 미끄러지듯 천천히 걷히자, 카메라가 심해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을 타고 빠르게 오른다. 계단꼭대기엔 종려나무 잎새가 황금빛으로 번쩍이고 있다. ‘황금종려잎새’ 뒤로 무수한 별들이 조연처럼 반짝인다. 2003년 ‘제56회 칸 국제영화제’는 12일간(5월14일∼25일)의 일정을 그렇게 시작했고, 13개국이 참여한 공식경쟁작 20편 가운데 계단 끝까지 올라가 ‘황금종려’를 가슴에 안은 작품은 구스 반 산트(50)의 ‘코끼리’였다. 영화 ‘굿 윌 헌팅’, ‘아이다 호’ 등으로 알려진 미국감독 구스 반 산트는 미국 교내 총기난사 사건을 다룬 이 영화로 감독상까지 2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올해 칸을 두드린 작품은 모두 2천298편, 참가국수는 81개국이었다. 참가국 수는 지난해보다 8개국 줄었지만, 작품편수는 10% 늘었던 만큼 칸 현지에 있는 4천여명의 취재진, 15만여 관광객을 비롯한 전 세계 영화팬들의 기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개막작 ‘팡팡 라 튤립’의 뚜껑을 여는 순간 칸 국제영화제조직위는 ‘지나치게 안일한 선택’을 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개막작의 실패는 공식경쟁작에 오른 작품들에 대한 부정적인 추측으로 이어졌다. 왕가위, 쿠엔틴 티란티노 등 참여가 예상됐던 몇몇 명장들이 불참한데다 개최국 프랑스 영화의 대거 포진(5편)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 심지어 전쟁과 사스까지 들먹여 지면서 ‘역대 최악’이란 부정적인 시각은 설득력을 더 했다.
그런 와중에 심사위원상을 안은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오후의 5시’, 심사위원대상과 남우주연상을 받은 누리 빌게 세일란의 ‘우자크’, 프랑수아 오종의 ‘스위밍 풀’, 라스 폰 트리예의 ‘도그빌’, 각본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드니 아르캉의 ‘야만족의 침공’ 등 세련되고 잔잔한 울림을 주는 영화들이 하나 둘 상영되면서 관객들의 마음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수상으론 이어지지 못했지만 영화제 후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에 이르러서는 ‘거장의 신화는 계속된다’는 찬사까지 흘러 나왔다.
우리 영화가 경쟁작에 단 한 편도 진출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현지를 종횡무진 누비며 뛰어다니는 우리 영화인들의 노고는 높이 살만한 것이었다. 영화평론가들은 빵쪼가리를 입에 물고 다니며 많게는 하루 6편까지 영화를 읽었다.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민병록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등 많은 영화인들이 세계 영화의 흐름을 목격하기 위해 현장을 지켰고, 이창동 문화부장관은 그들을 격려했다.
칸 영화제는 귀족·상업적 영화제란 혹평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한줄기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영화인들의 예술혼을 불사르는 축제인 것만은 분명했다.
폐막작인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보고 떠나오는 기자의 눈에 뤼미에르 대극장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문구가 들어왔다.
‘VIVA IL CINEMA!’(영화여 영원하라!) <글·사진=김진국기자> freebird@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