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을 퍼다 놓은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두덩이 앞에 ‘대장장이’가 죽은듯이 무릎을 꿇고 있다. 가볍게 바람이 일 때마다 풀어헤친 머리사이로 두개의 검은 광채가 번뜩인다. 동공은 타오르는 진주홍빛 불길을 반사한다.
 한동안 바위처럼 앉아있던 그는 불두덩이에 몸을 담그고 있던 ‘검’을 천천히 빼낸다. 손잡이를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치-이-익. 시뻘겋던 ‘검’이 물에 들어가자 아이 낳는 산모처럼 몸부림치며 하얀 연기를 뱉어낸다.
 ‘대장장이’는 이제 쓱 쓱 칼을 갈기 시작한다. 칼날 위로 소나기같은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고 또다른 여명이 밝아온다. 이윽고 그는 땀과 쇳가루가 범벅된 ‘검’에 정한수를 천천히 붓는다. 이어 일출을 등진 채 ‘검’을 양손에 들어 올린다.
 한줄기 하얀 빛이 날을 타고 빠르게 흐르더니 칼끝에서 번-쩍 하며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퍼진다. 천하를 통일 할 ‘명검’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검’ ‘고려청자’ ‘이조백자’를 빚어내던 우리 선조들은 ‘테크니션’(기술자)이 아닌 ‘마이스터’(장인)였다.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 때 불꽃같은 ‘열정’과 심해같은 ‘영혼’을 담았다. 그들은 발자취는 지금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들의 혼을 잇는 이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장인’의 맥을 잇는 이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일제의 민족예술말살정책과 격변의 현대사 속에 ‘장인’을 보호할 만한 여건을 우리 모두가 만들어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인천엔 ‘예술혼’을 불사르는 각 부문의 장인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들 모두 국가지정 주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문화재청이 지정만 하고 후속대책을 세우지 않아 ‘고군분투’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부분 나이가 많이 들어 후계자를 키워야 하는데 지원이 미미해 ‘내가 맥을 잇겠다’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에겐 한달 90만원이 지급되는 것이 고작이다. 그나마 준 보유자일 경우 35만원밖에 받을 수 없다. 그 돈으로는 후계자 양성은 커녕 가족들이 먹고 살기도 힘들다.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대에서 맥이 끊길 것을 걱정하며 폭풍을 만난 횃불처럼 마지막 예술혼을 남은 여생에 바치고 있다.
 인천에 있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완초장’(103호), ‘화각장’(109호), ‘궁시장’(47호)을 찾아가 본다.
 #완초장 이상재(60·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286-1 건영빌라 가동101호)
 완초란 우리나라 특산물로 경기·충청지방에서 재배하는 왕골을 말한다. 조선시대 왕골은 궁중진상품이나 외국교역품으로만 사용될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옛부터 강화군은 왕골로 만든 특산품인 화문석의 고장이다. 화문석은 여름엔 땀이 배지 않아 촉감이 부드러우며 가볍고 시원하며 겨울엔 보온효과가 뛰어나다. 꽃삼합, 와골동구리, 사주함 등은 미적가치가 높다. 강화는 특히 기후조건이 알맞아 질이 좋고 많은 이들이 왕골로 생계를 대신해 왔다.
 왕골은 4∼5월에 심어 7∼8월에 수확한다. 이것을 말려뒀다가 물에적시거나 물감을 들인 뒤 날대를 세워서 엮으면 비로소 하나의 예술품이 탄생한다. 이는 손으로 짜는 방법이며, 화문석은 두가닥 실을 자리틀에 걸고 자리알을 두 가닥 실로 엮는 노경소작법으로 만든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집집마다 왕골을 했었어요.” 교동에서 태어난 이씨는 14살때부터 왕골을 배웠다. 그는 96년에 문화재로 지정됐으며 하루 10시간∼12시간씩 정성스레 올을 엮고 있다.
 “지금은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현재 가르치는 제자가 2∼3명 정도이지만 그 제자들도 잊어먹지 않을 정도로만 배우고 있다. “이렇게 가다가는 발전은 커녕 맥을 잇기도 힘들 것 같아요.” 완초장의 왕골을 엮는 두손은 무거워만 보였다. ☎(032)932-9018.
 #화각장 이재만(53·남동구 간석1동 900-25)
 화각장은 ‘화각’을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다. ‘화각’은 쇠뿔을 얇게 펴서 그 뒷면에 구름과 용, 소나무와 호랑이, 봉황이나 사군자 등 화려한 그림을 그린 장식. 이것은 나무로 만든 가구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목판 뒤에 붙여서 아름답게 장식하는데 썼다. 화각공예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독특하게 발달한 공예기법으로 조선시대 왕실공예이다.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숫소의 곧은 뿔을 골라 속에 차있는 뿔심을 제거한 뒤 열을 가해 뿔을 얇게 편다. 이를 0.3mm 두께로 갈아내 투명하게 만든 뒤 그 위에 채색을 하면 화각이 완성된다. 이것을 나무면에 붙이고 옻칠을 하면 아름다운 화각공예품이 얼굴을 드러낸다.
 서울에서 태어난 이재만씨는 19살 때부터 고 음일천옹 수하에서 밥짓기를 하면서 화각장을 배웠다. 그는 스승이 타개한 29살이 되던 해 독립해 화각을 만들어 왔으며 화각균열과 변형막는 법을 연구해 자신의 작품에 적용했다. “제자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여건이 안돼 속이 탑니다.” 그 역시 후계자를 키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 그는 전통공예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고 국가나 시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나마 있는 학교들은 현대공예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씨는 현재 자택2층에 전시장을 마련하고 있으며 조만간 개장한다. ☎(032)428-5994.
 #궁시장 박호준(60·부평구 산곡1동 179-101)
 옛부터 우리나라는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하여 ‘동이족’이라고 불리어 왔다. ‘궁시’의 ‘궁’은 활을 말하는 것이며 ‘시’는 화살을 가리킨다. 궁시장은 선사시대부터 사용되던 활과 화살촉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하는 장인을 말한다.
 인천 태생의 고 김장환옹이 150년 동안 대를 잇던 각궁을 만들던 가업을 지키다 1984년 작고했고 화살을 만들던 궁시장 고 박상준옹이 2년전 세상을 떠난 뒤 지금은 아들 박호준(60)씨가 준보유자로 남아 있다. 그는 화살만을 만들므로 엄밀히 말해 ‘시장’이라는 명칭이 맞다. 박씨는 18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화살 만드는 법을 배웠으며, 그의 할아버지가 고종때 무과에 합격한 뒤 화살을 만들어 쏘기 시작하면서 ‘화살만들기’는 밀성 박씨의 가업이 됐다,
 화살은 우선 ‘시누’(1년∼3년 미만의 햇대나무)를 선별해 섬세하게 다듬은 뒤 화살 양쪽에 쇠심줄을 감는 것으로 시작된다. 촉을 끼우는 앞부분(상사)에 놋쇠로 만든 토리를 입히고 화살촉을 끼운다. 화살대를 단단히 감아 조이는 데 쓰이는 복숭아 껍질인 도피를 뒷부분에 끼우고 암놈꿩털로 깃을 세운 뒤 활 시위를 먹일 수 있는 홈인 오늬를 만들면 화살이 완성된다.
 박씨는 준보유자이므로 35만원을 받고 있다. 그 돈으로 제자를 키운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지금은 아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제자들을 길러낼 여건이 되면 더 바랄게 없겠지요.” ☎(032)503-5651.<글·사진=김진국기자> freebird@incheon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