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이일성씨 억울함 털어놔
1952년 강제로 끌려간 선감도서
구타·강제 노역의 지옥 생활
수소문해 찾아온 父 의해 탈출
도, 명부 없다고 피해자 불인정
“인정받아 명예회복 하고파”
“원아 대장에 없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아니라니 너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집니다.”
26일 인천일보는 지난 9월부터 시민사회단체 등을 수소문한 끝에 '기록되지 않은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 이일성(82)씨를 단독 인터뷰했다.
이씨는 경기도가 보유 중인 원아 대장(1955~1982년)에 없는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선감학원에 강제 수용됐다. 여기서 이씨는 다른 피해자들과 똑같이 구타, 강제노역 등 지옥의 수용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씨의 말처럼 경기도는 원아 대장에 없다며 그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20일 선감학원 사건의 진실을 규명한 진실·화해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를 밝혀낼 수 있었지만, 진화위 역시 도의 원아 대장을 토대로 피해자 인정 여부를 가려내 조명하지 못했다.
이씨처럼 원아 대장에 없는 1942~1954년 피해자들은 국가기록원이나 경기도 부녀아동과가 작성한 공문상에 5700여명으로 적힌 만큼 1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어떤 기관도 살펴보지 못한, 사각지대에 놓인 피해자들이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지난 1952년 수원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껌을 팔던 이씨의 앞에 파란 트럭이 세워졌다. 이어 트럭에서 내린 남성 두 명은 이씨가 어디에 사는지 물었다. 이씨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남성 두 명은 곧장 그를 트럭 뒤편에 강제로 넣었다.
트럭은 관공서 같은 건물에 도착했다. 거기엔 이씨처럼 끌려온 아이들이 10여명 있었다. 두 남성은 아이들에게 설렁탕을 먹인 뒤 다시 트럭에 태워 돛단배 한 척이 세워져 있는 바닷가에 데려갔다. 이씨는 타기 싫다며 발버둥 쳤지만, 그들의 강압에 못 이겨 돛단배에 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이동해 도착한 곳은 목욕탕이었다. 이씨가 목욕탕에서 씻고 나오자 입고 왔던 옷들은 사라지고 주머니가 없는 까만 교복과 내복, 모자만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씨는 '성심사'라는 기숙사동으로 가야 했다. 이씨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이씨는 선생이라 불리는 관리자 앞에서 아침조회를 했다. 조회 이후 관리자는 그를 포함한 150여명을 일렬로 줄짓게 해 선감학원 주변을 한 바퀴 돌게 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섬에 갇혔다는 걸 깨달았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전쟁에도, 전쟁 이후에도 '부랑아 교화'라는 명목으로 운영됐다. 실제 이씨는 선감학원에서 전쟁으로 부모와 형제 모두 잃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씨는 비교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건물 청소와 관리자 방 군불 때기, 연장창고 관리 등을 했다.
그곳에선 심한 구타와 폭언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단체 기합이라는 명목으로 무차별하게 때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아이들끼리 서로 때리게 했다. 이씨는 식사량도 워낙 부족한 탓에 매일같이 굶다시피 했다.
맞고, 욕설을 듣고, 굶주리는 생활이 2년이 넘게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선감학원으로 직접 찾아왔다. 아버지는 이씨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리고 온 동네를 수소문한 끝에 이씨의 행방을 알게 됐다.
이씨는 그렇게 입소한 지 2년 6개월 만에 선감학원을 탈출할 수 있었다.
먹고살기가 바빴던 그는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잊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올해 1월 그는 경기도가 선감학원 피해자를 대상으로 생활안정지원금, 의료서비스 등을 지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도청을 찾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도는 이씨가 원아 대장에 없다며 피해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전에 진화위가 2020년 12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선감학원 피해자 대상으로 진실규명을 위한 신청을 받았지만, 이씨는 12년째 전립선암 투병 중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피해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하는 게 유일한 바람이라고 호소했다. 사실이 아닌데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부랑아'라고 낙인이 찍히는 건 치욕적이라는 이유다.
이씨는 “어릴 때 그렇게 끌려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고생했던 걸 떠올리면 참 이루 말할 수가 없다”며 “바쁘게 사느라 그 끔찍한 기억을 잊었었다가 나를 피해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부턴 트라우마로 악몽을 꾸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록에 없다고 당했던 고통이 없던 게 되는 건 아니지 않냐”며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될지 몰라 하루라도 빨리 인정받아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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