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답동성당(중구 우현로 50번길)은 개항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인천에서 처음으로 건립한 가톨릭 성당이다. 프랑스 외방선교회 빌렘이 구한말인 1889년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해 답동 언덕에 터를 마련해 1897년 7월 완공됐다. 당시 서울의 관문이자 외국 무역의 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췄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았다고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붉은색 외관·정면 3개 종탑·뾰족한 돔 등이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한다. 국내 성당 중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문화재청에서 1981년 9월 국가 문화재 사적 제287호로 지정했다.

답동성당 건물은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때 집중포화로 인해 훼손됐다. 그래도 상당 부분이 살아남아 그를 토대로 다시 복원했다. 답동성당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마치 인천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여겨졌다. 그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데다 외적으로도 건물의 웅장함을 더해서다. 이후 인천 여기저기에 고층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생겨서 그렇지, 이전엔 답동성당 만한 곳이 별로 없었다. 학창 시절 가끔 답동성당을 기준으로 지인들과 약속을 잡던 기억이 새롭다.

그런 답동성당 일대가 이제 시민광장과 쉼터를 갖춘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해 눈길을 모은다. 새로운 원도심의 명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중구는 지난 21일 '답동성당 관광자원화 사업 준공식'을 열고 대내외에 홍보를 시작했다. 2021년 2월부터 310억원을 들여 답동성당을 가리던 가톨릭회관을 철거해 그간 시가지에서 보이지 않던 성당을 드러내는 동시에 성당 일원에 휴식 공간과 편의시설을 만들어 지역 대표 역사·문화 공간을 조성했다. 지하 4층 규모의 211면짜리 주차장도 함께 지어 신도와 관광객들이 이용하게 했다.

녹지쉼터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을 그린 청동 조형물도 꾸며 놓았다. 성당의 역사·종교적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광장 일원엔 예수의 고난과 희생을 나타낸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해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했다. 아름다운 답동성당의 자태와 위용을 살려 인천의 역사적 건축물이자 종교 유적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번 사업의 의미는 자못 깊다. 개항기 근대역사 발자취와 종교 문화를 골고루 체험할 수 있도록 해서다. 답동성당이 우리나라 대표 역사·문화·종교 탐방 명소이자 원도심 관광 활성화를 다지는 초석으로 자리잡았으면 싶다. 중구는 대한감리회 내리교회, 성공회 서울교구 내동성당 등 국내에서 처음 건립한 각 종교시설에도 각별한 신경을 써주길 바란다. 그래서 인천이 유서 깊은 종교의 산실임을 일깨웠으면 한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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