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년)은 인천이 낳은 걸출한 정치 지도자다. 강화군 선원면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벌였으며,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다. 이승만 정권 아래서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959년 7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유명한 '사법 살인'의 희생자였다.

죽산은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초대 농림부 장관 시절엔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의 농지개혁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진보당을 창당하고 1956년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후, 1958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등으로 기소됐다. 결국 사형을 받았지만, 유족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인 대법원이 2011년 1월 무죄 판결을 내렸다. 사형 집행 52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고 복권됐다.

학계와 정치권에선 여러차례 죽산 복권 시도를 했다. 1992년 10월엔 여야 국회의원 86명이 서명한 죽산 사면·복권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조봉암 연루 진보당 사건이 이승만 정권의 정치탄압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재심을 권고했다. 마침내 대법원은 “죽산은 독립운동가이면서 농지개혁 등 우리 경제체제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지만, 잘못된 판결로 사형을 집행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 조봉암 선생 유족들은 죽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며 국가보훈처(국가보훈부 전신)에 세 차례 요청했지만, 보훈처는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반려했다. 독립유공자 공적심사기준에 미달되는데, 1941년 12월23일 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죽산이 휼병금(장병 위로금) 150원을 냈다는 기사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친일 혐의 기사엔 날조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죽산의 항일운동 서훈 평가가 주목을 받는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최근 조봉암 선생에 대한 재평가 필요성을 언급해서다. 그는 “역사적 인물에게 그림자가 있더라도 빛이 훨씬 크면 후손들이 존중하고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더불어 죽산의 생가터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사업도 추진된다. 조봉암 농지개혁 기념관 건립위원회는 지난 13일 창립총회를 열고, 죽산이 태어난 선원면 일대에 기념관을 짓기로 결의했다.

인천시도 민간단체에만 맡기지 말고 불세출의 정치 선구자 죽산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 나서길 바란다. 죽산 기념은 항일 독립운동사와 지역의 정신사를 아우르지 않는가. 무엇보다 그의 생가와 활동 연고지를 살펴 보존해야 한다. 정부에서도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재평가하려는 마당이다.

▲ 이문일 논설위원.
▲ 이문일 논설위원.

/이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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