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갯소리로 수능시험에 나온 시(詩) 문항은 그 시를 창작한 시인 자신도 틀린다는 말이 있다. 시는 발표되는 순간, 시인의 품을 떠난다. 해석의 경기장에서는 창작자 자신도 단지 한 명의 선수가 된다. 유행가 가사가 모두 내 얘기인 것처럼, 시 또한 모두의 인생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 모두가 같은 삶을 살지는 않는다. 시가 사람마다, 삶의 굽이마다 매번 새롭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지나간 인생은 다시 살 수 없다.
하지만 책은 언제든 다시 읽을 수 있다. 신형철은 인심 쓰듯 독자들에게 권한다. 시의 맨 처음으로 계속 되돌아가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 길에서 작품이 품고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남김없이 다 걸어도 된다고. 마치 친한 벗에게 말 걸듯 다정히 토닥인다.
동서고금에서 쓰인, 인생 그 자체의 역사가 이 책에 있다. 신형철은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며, 사람들은 어떤 일을 통해,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고 말한다. 고통의 각, 사랑의 면, 죽음의 점, 역사의 선, 인생의 원, 반복의 묘. 신형철이 만나고, 다시 겪었던 인생의 장면들이다. '반복의 묘'로 칭해진 마지막 부록을 제외하면 장마다 각각 다섯 편씩, 모두 스물다섯 편의 시를 엮은 시화(詩話)집이다. 가장 오래된 인생의 고통을 담은 공무도하가에서 시작해서'모두가 사랑하고 대부분 오해하는'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로 여정을 마무리한다. 부록에 묶은 자유로운 형식의 다섯 편의 글은, 신형철의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시는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 아래로 쌓여간다. 신형철은'인생의 육성'이란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는다. 인생 또한 걸어가며 축적된다. 우리네 인생과 시는 서로 닮아있다.
슬픔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시인 에밀리 디킨슨. 언어에 대한 환멸이 심해질 때마다 약을 구하듯 되돌아가는 책 중 하나인 손재준 번역 릴케 시선집 <두이노의 비가>. 우리에게 그가 있어 온통 다행인 일들뿐인 시인 김수영. 언제나 살기 위해 썼지, 쓰기 위해 살지 않았던 최승자. 허공을 허공으로 돌려보내는 나희덕의 시 <허공 한 줌>. 신형철의 시화집 <인생의 역사>에는 그의 삶이, 그의 역사가 오롯이 담아져 있다. 반갑다.
신형철은 그의 또 다른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머리말에서 글쓰기의 단계별 준칙을 정리한 적이 있다. 첫째,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할 것. 좋은 글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뜻한 바를 백 퍼센트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이 써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모든 문장이 제 자리에 놓이도록 만들어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형철은 다시 사족(蛇足)을 단다. 자신이 쓴 글들은 그가 설정한 기준에 언제나 미달했음을 고백한다. 고백은 고백일 뿐. <인생의 역사>에서 담고 있는 문장은, 그가 제시한 글쓰기의 준칙에 부족함이 없다.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 어렵다고 한다. 신형철은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정, 그리고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그가 시를 읽는 이유 중 하나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인생의 역사>를 넘기다 보면 표지 그림이 담긴 엽서 한 장을 만나게 된다. 그 엽서에 쓰인 글귀를 옮긴다.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을 읽고 내가 기다려 온 문장이 바로 이것임을 깨닫는다.
이 책에 그런 문장이 하나라도 있다면 저는 얼마나 좋을까요. 신형철”. 그의 책에서 나에게 절실한 문장, 내가 기다려온 문장을 수첩에 적는다. 빼곡히 수첩 여백이, 신형철의 문장들로 채워진다. 나는 좋은 책을 만났다.
/이성희 서운중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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