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영문도 모른 채 개항 맞아
이방인들에 요지를 터전으로 내줘
일본 청·러시아 상대 전쟁 승리 뒤
제물포 포구 독단적으로 주물러
인천항에 불량배도 쏟아져 들어와
양민 선동·관민 협박 무례한 행동
술 취해 가정집 침입해 난동 행위
사기로 한인 유인해 익사시키고
알몸 노출벽 등 성적 방종 행위도
조선에 일용품 팔아 경제적 이득도
이 글의 두 번째 장(章)을 '빗나간 개항장, 제물포'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는 제물포 개항이 손끝만치도 제물포를 위해서, 나아가 나라의 득이 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임은 누
차 지적한 바 있다.
하기사 일본이 저들의 완력으로 강제 개항을 해 놓은 마당에, 무슨 까닭으로 제물포를 위하고, 또 이 나라의 이익이 되게 하겠는가. 개항을 종용할 때야 입으로는 얼마든지 '백 가지 물화가 유통되고 피차 이익이 통할 것'이라고 뇔 수 있는 것.
그런 개항이었으니 '빗나간 개항' 운운하는 말이 애초에 합당치 않고, 부질없는 허사(虛辭)라고 하겠지만, 개항을 강압한 당시 일본의 실체를 알고 나면 잘못된 개항에 대해 더욱 자괴와 분노가 치민다.
모든 건설 사업이 그렇지만 특히 항구 도시의 건설은 재력과 기술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야망과 인력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인천 개항에는 야욕만 앞섰지 총칼 이외는 실력의 뒷받침이 없었다. 일본은 명치정부가 수립된 지 10년밖에 안 되는 전근대적인 수준이었으며 청일전쟁(1894)의 승리로 간신히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그 후 러일전쟁의 승리로 근대화를 성취하는 발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인천도 동일한 경로를 밟아 성장했다.
개항 후 인천에는 한탕하려는 일인의 무리만이 들끓고 있었으니 무(無)가 무(無)에서 무엇을 어떻게 창조할 수 있는가. 이 점이 바로 개항을 맞은 인천의 당면한 불행의 시발점이었다.
이 역시 신태범 박사의 『개항 후 인천 풍경』에 나오는 구절인데. 요약하면 제물포는 그저 총칼만 든 전근대적인 국가 일본에 의해 개항된다. 그 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고서야 일본은 근대화를 이룬다. 그 기간이라는 것이 제물포 개항 후 러일전쟁까지의 22년 세월이었다.
이런 일본의 손아귀에 끝내 우리가 들었었다는 생각을 하면 기가 막힌다. 더구나 개항이라고 해놓고 달려든 자들이 고작 이따위 부류들이었다면, 빗나간 개항 정도가 아니라 차라리 '인천의 불행'이란 신 박사의 표현이 백 번 옳을 것이다.
이렇게 길게 빗나간 개항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선, 일본, 청국, 그리고 구미 각국 등 4개의 국경과, 그 안에 각각의 국민들이 살았던 기묘한 도시, 인천의 조계(租界)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이 장을 마무리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조계란 제물포 사람들이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또한 이유도 영문도 모르는 채 개항을 맞고, 또 아무런 유대도 교류도 없는 채 밀려드는 낯선 이방인들에게 포구의 요지(要地)를 저들 삶의 터전으로 내준 곳이다. 따라서 이 세 곳, 일본·청국·각국조계의 풍경 그 자체가 바로 빗나간 개항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개항 이후 일본이 열강들과 우리 조정에서 벌인 끈질긴 헤게모니 싸움과 자신들이 이룬 개항이라는 자신감으로 제물포 포구를 거의 저들 독단으로 주무르면서, 일본조계의 인구는 설정 2∼3년 후에 이미 포화 상태가 되어 조선인촌으로 밀려든다. 특히 청일전쟁 무렵에는 조선이 만만하고, 인천이 무인지경이라고 생각한 일인 불량배들까지도 마구 인천항에 쏟아져 들어온다. 1933년 인천 개항 50주년을 맞아 저들이 발간한 『인천부사(仁川府史)』에도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정세가 날이 갈수록 불안해지는 가운데 일본에서 청년 불량배들이 인천으로 건너왔다. 그들은 말단 정당원(政黨員)으로 통하거나 또는 신문·통신 관계자나 유지인(有志人)으로 자칭하였는데 거류지에서는 기이, 과격한 언동을 시도하며 양민들을 선동하고 조선 내지로 진입해서 지방 관민들을 협박하는 등 무례한 행위가 아주 많았다.
오죽했으면 일본 영사관에서조차 자국 불량배들의 내항(來航)과 조계 내 거류민들을 스스로 단속할 정도였을까. “헌옷을 입고 때 묻은 얼굴, 지팡이를 든 불량배들이 시내를 고음(高吟) 만보(漫步)하며 불법 행동, 폭행을 일부러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들의 행패가 여간 심했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러일전쟁까지, 두 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뒤, 누구로부터도 간섭과 견제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황이 되자 일본의 전횡이 실로 안하무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사실은 역사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일인들이 인천에서 벌인 오만한 행태와 폭력적 분위기는, 유일하게 기록이 남아 있는 『개항 후 인천 풍경』을 통해 짐작할 수가 있다.
두 번의 전쟁을 가까이서 이겨낸 인천의 일인들은 기세가 등등했다. “짱꼬르(청인)와 로스케(러시아인)를 쳐부쉈으니 요보(한국인)는 이제 우리 밥이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주고받았다. 더구나 러일전쟁에 참전하여 전쟁터에서 약탈과 폭행에 재미를 붙인 제대 군인들이 맨주먹으로 쏟아져 나와 일본촌의 공기는 살벌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한국인을 깔보는 건달패와 협잡꾼이 되어 전국을 휩쓸었다.
신 박사가 지적한 약탈이나 폭력 행태가 터져 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술 취한 일인이 한국인, 일인 가정에 침입하여 야료를 부리거나, 3인조 절도단 사건, 사기로 한인을 유인해 물에 빠트려 익사(溺死)시킨 사건 등 그야말로 살벌한 범죄를 저지른 일인들이 있다. 이러한 기사는 1908∼9년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자주 실렸다.
“알몸을 가리려고 하지 않는 노출벽과 내외를 모르는 성적 방종”으로 한국인의 뇌리에 흉하게 인상 박혀 있던 자들은 이제 해안을 매립하여 시가지를 꾸미고, 전기로 불을 켜고 수돗물을 마셨다. 저들 본국에서 각종 일용품을 수입하여 한국시장에 판매함으로써 경제적으로도 청국 상인들을 앞서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개항 25주년 무렵, 기세가 등등해진 일인들은 제물포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한국인들로부터, 착취와 독단으로 이룬 이 모든 것들을 오직 저들의 “진취적인 노력”에 의해서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김윤식시인. 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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