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이 나라 역사의 흐림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참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마련하셨나니/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간신이 임금에게 아부하는 글이 아니다. 미당 서정주가 1987년 1월 18일, 당시 전두환대통령에게 바친 `전두환대통령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의 일부이다.
 여야 개혁파 의원들이 3·1절을 맞아 708명의 친일인사, 정확히 표현하면 `반민족 친일부역행위자""의 명단을 발표하면서, 우리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반민특위""가 이승만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후, 반세기만에 비로소 다시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할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반면 사주가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일부 신문들을 중심으로 인물선정 과정의 객관성 등을 문제 삼으면서 `물타기식""의 비판을 하기에 바쁘다.
 일부에서는 당사자들의 대부분이 이미 죽은 지금 굳이 과거의 문제를 끄집어낼 필요가 있느냐고 주장한다. 또 친일은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모두가 독립운동가가 되어 목숨을 걸고 일제에 맞서 싸우지 않은 것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영달과 출세를 위해, 일본천왕에 대한 충성과 황국신민화에 앞장서고 조선청년들을 전쟁에 나가서 죽도록 독려하면서 민족반역행위를 한 비굴한 지식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심판이다.
 708명의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서정주는 친일파의 문제가 단순히 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문제이고 또 미래의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서정주는 가미가제 특공대로 출전하여 “옥쇄”한 조선청년의 죽음을 숭고한 애국행위로 미화 찬양한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를 비롯해서, 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면서 조선청년들을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학병 지원을 권유하고 정당화하는 내용의 단편소설 `최체부의 군속 지망"" 등 많은 친일작품들을 양산했다.
 그는 해방 후에도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에 빌붙어 자신의 영달을 꾀하기에 급급했다. 겉으로는 순수문학을 내세웠지만, 그는 늘 권력과 양지만을 지향하는 가장 정치적인 문인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문학계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문하에 수많은 제자와 추종자들을 거느린 거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문단 등단이 가능했고, 그의 후광은 성공의 보증수표였다. 서정주는 문학계에서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되었다. 중앙 일간지에서 그를 기리는 `미당문학상""이 제정되었고, 그의 모교에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처럼 친일파 청산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친일파들의 자손과 그 추종자들은 우리사회에 거대한 `메인스트림(주류)""을 형성하면서 수십년동안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왔다. 이들은 각계각층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세로 존재한다.
 해방후 우리 사회가 겪은 파란만장한 굴곡과 정치적 파행은 그 원인이 상당부분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정직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어 보지 못했다. 정의로는 사람이 승리하는 역사를 세워본 적이 없다. 늘 기회주의자들만이 설쳐댔을 뿐이다.
 친일파들이 변신과 재기에 성공한 비결은 바로 `반공""과 `친미""의 탈이었다. 친일파들은 반공주의자로 변신했고, 반공만 내세우면 그들의 친일행각은 덮어졌다. 친일파들은 오늘날 다시 맹목적인 `친미사대주의자""로서 존재한다. 미국사람보다 더 미국적이며, 늘 미국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미국을 옹호하고 대변하기에 바쁘다. 친일파 청산은 희망차고 정의로운 나라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와 민족 앞에 겸허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