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3000여농가서 재배 … 농부 대부분 60대 이상
'민간요법' 애용하던 1947년, 환갑 넘긴 사람 7%뿐
▲ 지금 강화도는 속노랑고구마 수확이 한창이다. 속노랑고구마를 재배하는 농부 김영신 옹, 심상점 선두2리 이장, 유의숙 여사(사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가 수확한 고구마를 들고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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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깔, 연보라빛깔, 노란빛깔, 짙푸른 가을하늘과 맞닿은 '속노랑고구마밭'이 햇살을 받아 무지개처럼 반짝인다. 호미로 쓱쓱 긁어 집어올린 줄기엔 탐스런 고구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고구마를 뚝 잘라 속을 보니 연한 노란색을 띠고 있다. 밭에서 방금 캐낸 이 고구마는 10일~15일 정도 숙성시키면 무지개빛깔로 변할 것이다. 그럼 아주 달콤하고 촉촉한 식감의 강화도 속노랑고구마가 탄생한다.

25일 아침 강화군 길상면 해안남로 845의 7 앞 고구마밭. 호미를 사용해 고구마를 캐는 고구마농부 김영신(76), 유의숙(74) 부부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10분이나 캤을까? 여러 개의 플라스틱 상자에 고구마가 넘치도록 담겨진다. 밭 한 가운데서 고구마 상자를 들고 나오는 부부와 일손을 돕는 심상점 선두2리 이장의 얼굴이 방금 캐 낸 고구마 속처럼 환하다.

속노랑고구마는 강화도 3000여농가가 550㏊에서 재배하는 최고의 밭작물이자 강화도 특산품이다. 20년 전 인증을 받아 오직 강화도에서만 생산한다.

속노랑고구마는 5월쯤 고구마순을 심어 9월말에서 10월초 수확한다. 지금이 딱 수확철인 셈이다. 김영신 옹은 고구마가 잘 자라도록 지난 봄부터 밭 이랑을 파고 땅을 고르며, 자식 입에 밥을 넣어주듯이 물과 비료를 주었다.

선두포를 포함해 현재 선두리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연령은 60대 이상이 대부분이다. 선두포가 포함된 선두2리의 경우 총인원 312명(남자 161, 여자 151) 중 60세 이상은 131명으로 전체 42%에 이른다. 이는 1947년 코넬리우스 오스굿이 조사할 당시 연령대와 큰 차이가 있다.

1947년 선두포에선 40대는 '늙은이'에 속했고, 환갑까지 사는 사람은 '불사신'과 동급으로 취급됐다. 당시 가장 나이 든 할머니는 76세였고 할아버지는 70세였다. 선두포에선 환갑을 넘길 때까지 사는 사람이 7.31%가 되지 않았다. 선두포 인구의 56.8%가 20세 미만이었다. 현재 선두포 최고령자는 1921년생으로 올해 97세인 채선엽 옹이다.

1947년 사람들의 사망원인은 다양했다. 선두포 환자를 자주 보는 의사는 많은 어린이들이 결핵으로 사망한다고 말한다. 성인들은 주로 위와 장에 생긴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하는 듯하다. 그것은 이질의 한 종류인 적리일 수도 있다. 기생충을 비롯해 천연두,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콜레라와 같은 질환들도 사람들을 위협한다. 이런 질병들 중 몇 가지에 대한 백신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다. 나병이나 성병은 발생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드문 반면 간헐적으로 말라리아 발병 사례도 있다.

길상면 삼거리에는 의원을 운영하는 양의사가 2명 있었다. 한 명은 정식으로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였고, 다른 한 명은 의학책을 보고 독학한 의사였다. 한의사들도 있었다.

여기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는 영화감독 권칠인의 큰아버지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다. 권칠인 감독은 "큰아버지는 1911년생으로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뒤 고향인 강화읍에서 '구세의원'을 운영했으며 돌아가신 뒤 같은 학교를 졸업한 아버지가 의원을 이어받아 하다가 온수리에 '평화의원'을 차려 운영했다"고 말했다.
의학적 치료 외에도 마을 사람들은 의사가 아니지만 치료를 잘 한다고 소문난 이들을 찾아갔다.

약초를 이용한 민간요법도 널리 애용했다. 설사나 이질에 걸리면 양귀비 꽃잎과 입가루를 물어 넣어 끓여마시면 되고, 성병에 걸리면 살아있는 도마뱀을 콩잎에 싸서 먹었다. 말라리아를 낫게 하는 방법은 대변을 혀로 핥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친척이 데리고 돌아다니며 "학질 사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의사들은 키니네를 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명은 크게 늘었고, 선두포 역시 고연령대 인구가 넓게 분포돼 있다. 앞으로 70년 뒤에는 인간의 수명이 보통 100살은 훌쩍 넘어가지 않을까?

/글·사진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




한평생 '흙'과 살아온 속노랑고구마 농부 김영신 옹

"옛날로 치면 나는 '상늙은이' … 그땐 의원도 잘 못갔어"



"어려서부터 쭉 농사를 지었지. 지금이야 농사지어 팔기도 하지만 뭐 그 때는 농사지은 걸로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속노랑고구마 농부 김영신(76) 옹은 "옛날엔 속노랑고구마가 없었고 그냥 고구마를 심었는데 배고파 먹기 위한 것이었다"며 "속노랑고구마는 개발된 지 얼마 안 됐고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문을 한다"고 말했다. 강화도 토박이인 그는 길상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평생 흙과 더불어 살아왔다.

"나도 어려서부터 소, 돼지 키우고 농삿일만 하고 살아왔지. 내가 어려선 마을 어른들이 40살만 넘으면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었어. 노친네라는 표시였지."

김 옹은 "옛날로 치면 나는 상늙은이 중에도 상늙은이일 것"이라며 "지금은 젊은 사람들이 모두 외지로 나가고 나 같은 늙은이들만 남아서 농사를 짓는데 아직도 힘이 넘쳐난다"고 말했다. 1남2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의 머릿속엔 마을 의료기관에 대한 기억도 남아 있었다.

"내가 어려서 온수리에 의원이 있기는 했어. 그런데 촌사람들이 뭐 병원에 가나, 아프면 약이나 먹고 마는 거지. 삼성당약방이란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약을 많이 사먹었지. 마을에 정식 의사는 아니고 돌팔이의원도 있었던 기억이 나네."

그의 회상은 오스굿이 기술한 정식 의사와 면허가 없는 의사가 있던 1947년 당시 마을의 상황과 일치했다.
"자, 기자양반도 한 번 맛 보시겨."

자줏빛 고구마를 건네는 김 옹의 크고 투박한 손이 고향의 품처럼 따뜻하게 다가왔다. 김 옹이 판매하는 속노랑고구마는 택배비를 포함해 10㎏에 3만원이다. 010-9123-9584

/김진국 기자 freebird@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