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열사 일행 호위 완수, 귀국 뒤 항일투쟁 이어가
▲ 이태룡 박사가 7일 인천역사자료관에서 강연하고 있다.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고종이 헤이그에 파견한 특사가 네덜란드에 성공적으로 도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강화 출신 이능권 의병장 이야기가 펼쳐졌다.

이태룡 인천대학교 초빙연구위원(문학박사)은 인천역사자료관에서 7일 오후2시에 열린 '제98회 인천시 향토사 강좌'에서 '헤이그특사와 강화의병장 이능권'을 주제로 강연했다.

강화도에서 태어난 이능권(1864~1909)은 고종황제의 밀서를 가지고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할 이준 열사의 일행을 호위해 국외로 호송하는 막중한 임무를 완수했다.

앞서 조선은 일본군의 철통같은 수비로 국제사회에 조선의 뜻을 전달하는데 번번이 실패했었다.

고종은 묘안을 짜낸 끝에 이능권을 차출했다. 이능권은 육군장교 출신으로 수군 군관으로도 활약하고 있었다. 육지의 주요 길목과 항구를 막아서며 방해하던 일본 군경과 밀정의 감시망을 피해 특사를 안내할 수 있는 최적의 자질을 갖췄다.

일본 비밀기록에는 이능권이 '해적'으로 기록될 만큼 해전에도 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능권은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들어 특사를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보낸 후 귀국했다.

돌아와서도 흩어진 의병을 규합해 이끌면서 일본 적군 다수를 살상하고 강화군에서 막대한 군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는 등 일제에 항거했다.

강화를 중심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된 이능권은 강도와 모살죄(謀殺罪)로 교수형이 확정돼 결국 1909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태룡 박사는 이렇듯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후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의병을 연구해 재조명하고 있다. 일본 통감이 이능권 의병장에게 전달한 사형집행 명령 통보서 자료도 이 박사가 최초로 발굴했다.

이 박사는 "이 의병장이 없었다면 열강에게 주권회복을 호소한 한국의 외교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글·사진 장지혜 기자 jjh@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