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봉 인천대 기초교육원 객원교수

 

영화 <기생충>에서 부잣집 사모님 연교(조여정)를 만나고 집에 돌아온 기택 부부(송강호, 장혜진)는 연교에 대해 각자의 평가를 내린다. 기택이 "그 집 사모님은 부자인데도 착해"라고 하자, 아내 충숙은 "부자니까 착한 거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충숙은 자기가 그만큼 부자였다면 더 착했을 거라고, 가장 착했을 거라며 웃는다.
착한 것과 부유한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인데도 우리는 종종 이 두 단어를 연결해 사용한다. 기택의 말에는 부자들은 착하지 않을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착하지 않기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거라는 부정적 생각이 내면화된 것이다. 하지만 충숙의 말을 듣고 있자면 물정 모르는 순진한 생각 같으면서도 부정적 생각이 고착화되는 순간 착함이라는 개념도 바뀔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부잣집 사모님은 자신에게 이로운 사람에게는 무한 신뢰를 쏟아부으며 매우 착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전후 사정도 살펴보지 않고 내쫓아 버린다. 오로지 자신들이 만든 선(線)이 기준이다. 이 선을 넘지 않으면 너그럽고 교양 있게 대하지만 그 선을 넘는 순간 착함은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우받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은 부자들이 만든 선을 지킬 수밖에 없다. 완전한 복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이 착함에 길들여진다.
충숙이 생각하는 부자들의 너그러움과 교양은 자신들이 만든 선에 의해서만 좌우된다. 선을 넘지 않은 상황에서만 작동되는 착함이기에 돈으로 얼마든지 치장할 수 있다. 충숙은 자신이 부자가 되면 연교보다 더 착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그러움과 교양이 아니라 바로 '선'이다. 착하게 대할 사람을 자신들이 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절대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기택네 가족이 사는 반지하방에서는 기준을 만들 수가 없다. 시선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는 위에 오르면 기준을 만들 수가 있다. 이것이 상류와 하류의 차이다. 그래서 모두가 악착같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시선을 자본이 고착화시킨다는 것이다. 부의 세습은 결국 권력의 독점이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면서 이것은 더 두드러진다. 최악의 청년 취업난 시대를 맞이한 20대들을 좌절케 하는 것은 경쟁에서 지는 것이 아니라 취업난 속에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한다.
역대 최악의 청년 취업난 속에 또 다른 계층론이 생겨나고 있다. 부모의 부의 수준에 따라 직업은 '취미'인 상류층과 대기업이나 고시를 노리며 계층 이동을 꿈꾸는 중간층, 그리고 이조차도 못하는 하류층이 '수저계급론'이 나온 뒤 만들어진 '신계급 사회'라는 것이다.

직업은 취미인 상류층을 제외하더라도 중간층과 하류층의 격차가 너무 크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부모님의 지원으로 취업 준비를 하는 학생들은 그래도 계층 이동의 꿈이라도 꿀 수 있지만 학자금을 직접 갚고 취업 준비 비용을 마련해야 하는 학생들은 이러한 꿈조차도 꿀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언제나 날카롭게 날이 서 있다.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마음의 여유도 없다. 아니 없을 것이라고 치부한다. 이들은 돈이 없지 너그러움과 교양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하루는 선생님께 물었다. "가난한데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한데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괜찮은 사람이지. 하지만 가난한데도 삶의 도(道)를 즐길 줄 알고, 부유한데도 절제하는 예(禮)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다"고 공자는 대답했다. 부유하면 아무래도 교만해질 수 있다. 그런데 부유한데도 교만하지 않다면 꽤 괜찮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부유한데도 절제하는 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계급이 없던 시대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구분짓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자본이 계급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신계급 사회'에도 예는 필요하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가난한데도 삶의 도(道)를 즐기는 빈자의 배려만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제는 부유한데도 절제하는 예를 좋아하는 부자의 배려가 강조돼야 할 때다. 자신들이 만든 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너그럽고 교양 있는 착함이 요구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