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의 품격...'명작'을 짓다

 


신라라사
15평 남짓 가게.기술자 3명 … 김억규 재단사 "양복은 작품"

제왕양복점
최이성 재단사 혼자서 운영 … 최고품질 위해 최선의 노력



옷에 품격을 더하다. 수십 년간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 온 이들이 있다. 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양복'. 양복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남성 옷의 대표 상징이다. 1970~1980년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양복을 지어 입는 것은 하나의 문화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문화는 이어내려 오고 있다. 하지만 과거에 무수히 많았던 맞춤양복점들은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과거 양복하면 서울에 소공동, 부산에 광복동, 인천에 동인천이었던 때가 있다. 양복 거리가 형성될 정도로 양복이 부흥했던 당시 동인천 애관극장 근처에는 30여개의 양복점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영광은 빛바랜지 오래다. 현대 사회에 접어들면서 기성복에 밀려 동네상권에서 차츰 자리를 잃어버렸다. 대부분은 문을 닫고, 현재 몇몇 가게만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요즘 주문 제작 서비스가 관심을 받으며 '맞춤정장'이라고 간판을 걸고 장사를 하는 가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 접착식, 기성복과 동일한 제작 방식의 양복을 만든다. 제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고 있는 장인들은 몇 남지 않은 상황이다.


#신라라사
"인천에서 신라라사를 모르면, 지역주민이 아니었어요."
신라라사를 현재 운영 중인 김억규(67)씨는 깔끔한 양복 차림을 하고 손님을 반겼다. 15평 남짓한 가게는 1층과 2층으로 나눠져 있었다. 양복점 내부에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구들과 장식품들이 가득했다. 신라라사가 처음 문을 연 곳은 배다리 중앙시장이다. 당시 20여명의 기술자들과 함께 인천의 양복점으로 자리매김한 신라라사는 몇해 지나지 않아 동인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에는 엄청났죠. 인천의 양복하면 동인천이라고 할 정도로 이 거리가 활성화돼 있었어요. 신라라사는 장인 기술자들을 모아서 양복을 만들었어요. 문을 열고, 동인천쪽에 양복거리가 형성된다고 하길래 이동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단 3명의 기술자만 남아있다. 양복 부흥기를 누렸던 그는 그저 오래된 단골이 이곳을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한다.
"부산에서, 서울에서 심지어 미국으로 이민 가신 분들이 찾아올 때가 있어요. 오랜만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가게 앞에서 쭈뼛대시다가 부끄러워하며 가게를 들어오는데 그런 걸 볼 때마다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해요."
요즘 '맞춤정장'이라는 이름을 건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일부 맞춤정장은 대부분 수선에 그치고 마는 것이라고 한다.
"장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양복들은 몇 없어요. 저희에게 양복 한 벌은 파는 물건이 아니라 작품이에요. 옷이 정말 잘 만들어졌을 때 완성도가 높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신라라사만의 특별한 점이 있다면 운동선수와 같은 특이 체형을 가진 이들을 위한 맞춤 양복을 만든다는 것이다. 보정작업(가봉)시 균형를 잘 유지하고 소화할 수 있어야 특이 체형 맞춤복도 완성도가 높이 나올 수 있는데, 신라라사는 다른 양복점들에 비해 옷의 균형을 잘 잡는 편이다.
앞으로 양복을 만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김억규씨에게 걱정거리가 있다. 바로 수선에 그치고 마는 양복을 접한 사람들이 "수제 맞춤 별거 없구나"라고 생각을 하며, 맞춤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질까 우려된다고 한다.

#제왕양복점
"오는 분들은 계속 이곳을 찾아요."
대로변에 있는 '제왕양복점'은 간판부터 시선을 끈다. 낡은 데로 낡은 간판은 글자 몇 개가 이미 툭 떨어져 있다. 모진 비바람의 세월이 느껴지는 간판에서는 그동안의 노고가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다리미'다. 언뜻 보면 세탁소가 떠오르는 이곳은 정겨운 느낌을 풍긴다. 노루지가 깔리고 펜과 자, 가위가 놓이면 순식간에 '양복점'으로 바뀌는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최이성(62)씨는 혼자서 양복을 만든다.
"다리미는 마술사에요. 저게 있어야 작업이 시작되고 완성돼요. 양복의 곡선과 각을 찾아주는 친구예요. 양복이 잘 만들어져서 저도 기쁘고, 고객도 흡족해하면 세상을 다가진 기분이에요."
최이성씨는 오로지 기술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최고의 품질을 구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해왔다. 고객과 직접 소통을 하며 디자인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고객을 위한 제품을 만든다는 신념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양복에 입문한 나이 19살. 그전까지 그는 조선소에서 용접을 했다. 어느 추운 날 생과사를 넘나드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 용접일을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최고 멋쟁이들의 옷을 지어주는 일이에요.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거죠. 제가 만드는 옷은 기성복과 같이 미싱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모든 작업을 다해요. 그러다보니 약 한 달이 걸려 완성되죠. 저는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을 해요."
용접과 다를 것이 없다는 양복 만드는 일. 그는 두 가지 모두 열과 습도, 공기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제 양복은 숨을 쉬어요. 자연의 것들을 응집해 놓았기 때문이에요. 생명선이 옷이 변할 때까지 살아있어야 되는데, 제가 만드는 것이 그런 양복이라고 볼 수 있어요."
현재 동인천에서 양복을 만들고 있는 장인 중에 가장 젊은 최이성씨는 앞으로 꾸준히 이 자리에서 양복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글·사진 이아진 기자 atoz@incheo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