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경제연구소장
성철 스님이 남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가 한때 유행하였다. 내가 비록 그 내밀한 깊은 뜻에 도달할만한 수양을 갖추었을 리 없고 이 표현의 불교적 연원(淵源)이나 다양한 해석을 이 자리에 옮길 일도 아니지만, 나의 식으로 읽는 이 말의 울림이 있다.

우선 이 말이 나오기 위해서는, 산을 산이라고 하지 않고 물을 물이라고 하지 않는 세상의 정황이 전제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스님에게, 인간 세계는 무엇을 산이라고 불러야하는지, 무엇을 물이라고 불러야하는지조차 모르는 미망에 가득 찬 세계라는 인식이 있었어야 할 것이다. 결국 그러한 인식의 끝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언어의 장막에 갇혀 사물의 본질을 꿰지 못하는 중생의 미련함에 대해 터져 나온 스님의 한탄이거나 역정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인간의 언어라는 도구에 심각하게 절망하여 왔다. 하나의 어휘가 서로 정반대의 개념을 표현하는 반어적 중의성(反語的 重義性)과, 인류가 사용하는 어떤 언어의 어떤 어휘라 하더라도 단 하나의 사실도 일의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언어의 숙명적 불완전성에 절망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실재(實在)는 언제나 인간의 인식과 무관계하거나 인식을 초월한다"라는 다소 주제넘은, 스스로의 명제에 매달려 방황하였던 기억이 있다.

나의 그러한 방황과 절망은 "도가도는 비상도요 명가명은 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는 노자 도덕경 인입부의 표현에서 지지(支持)를 발견하고, "사랑과 자비, 어질거나 착함, 신성, 도덕과 정의, 가치, 절대, 무한과 없음…" 따위 인간들이 창조한(또는 발견한) 개념의 탐구과정에서 지금도 여전히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인간은 너무나 사랑한다는 언어를 이용해 헤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상대를 죽이기까지도 한다. 지구상에 전개된 수많은 인간 살육의 전쟁은 그 명분이 대체로 정의의 실현이었고 공정이라는 명분아래 무슨 죄가 있을까 싶은 이들의 행복이 수도 없이 짓밟히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겨왔다. 그런 중에 "내로남불" 따위 유치하고 천박한 언어는 차마 입에 담을 일도 아니지만 요즘에 이르러서는 몇 가지 선동적인 신조어들이 또 다시 심기를 어지럽힌다.

특히 경제와 관련해서 '일자리', '비정규직', '소득주도 성장론', '4차 산업혁명론' 따위 용어들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거니와, 나로서는 이러한 언어들이 무슨 이유로 조작되고 마치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과제쯤으로 강조되는 것인지 그 짐작되는 배경과 의미가 도무지 탐탁하지 않다.

도대체 그냥 직업이나 직장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일자리라고 하면 문제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인가. 무릇 모든 고용은 계약을 기초로 성립하는 쌍방계약 사무이거니와 단기계약직 사무를 왜 굳이 비정규직이라는 감정적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가. 이미 1920년대 말 대공황의 대책으로 케인즈에 의해 제시된 유효수요 창출 이론과 뉴딜정책을 소득주도 성장론이라는 이름으로 재포장하면 전혀 새로운 정책이 만들어지는가. 인류가 써내려가는 경제사는 새로운 소비영역의 창출과 그에 대응하여 좀 더 새롭고 좀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한 시도 쉼 없이 노력해 온 결과다. 그것을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고 인류 역사 밖의 역사가 열리는 것인가.

누가 어떻게 이야기하더라도 소득은 생산의 결과물이고 일자리는 그러한 생산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고용은 고용하는 자와 고용되기를 원하는 자 간의 조건의 타협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면적인 공산화를 도모하지 않는 한 언어의 조작에 의해 바꿔 놓을 수는 없다. 물론 더 이상 새로운 산업현장을 쉽게 창출해내지 못하는 파렴치한 자본가들이 이끄는 시장경제 속에서 꼼수로 등장한 용어가 하나의 생산직을 두 개 세 개로 나누는 일자리 분할이고, 세계화라는 자본 편의적인 이윤의 증대방안(신보수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의 노동계(ILO)가 철지난 케인지안 경제를 재포장해서 내놓은 것이 소득주도 성장론이라는 용어 탄생의 역사를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정부의 경제에 대한 목표는 완전고용과 물가안정이라는 전통적인 경제학의 관점은 달라지지 않고, 포퓰리즘이 어떤 춤을 추어도 근로의욕이 넘치는 국민, 신바람이 난 기업만이 한 나라의 경제를 살린다는 경제의 상식은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원칙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나라가 해주어야 할 일은 기업의 신바람을 옭아매는 권력의 축소, 공짜 소득만을 찾아 공중에 떠도는 투기성 자본과 매장자본의 산업자본화 전략, 땀 흘리는 자에 대한 숭배 분위기의 확대, 과감한 미래에 대한 투자와 다문화에 대한 개방, 이데올로기의 배척…. 그런 것들이어야 하지 않는가. 아무리 미련한 인간의 언어가 본래 무책임한 것이라 할지라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