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윤 동구사편찬위원회 상임연구원  
▲ 화도진도의 사도와 분도
개항장 제물포 앞 바다에 있던 크고 작은 섬들은 1883년 제물포의 개항과 함께 항만 인프라건설, 방파제와 유원지의 조성, 해안 매립에 사용할 골재의 채취 등으로 연육되거나 섬의 원형을 잃어버리게 됐다. 여러 섬 중 오푼도라 불리던 인천개항장 앞에 있던 사도(沙島)는 분도(糞島)와 함께 개항 후 매립과 축항이라는 개발 과정에서 섬의 모습을 잃게 되는 공동 운명을 갖게 된다.

옛 기록의 사도는 지지류의 섬 관련 항목에는 보이지 않으나, 지도류에는 제물포 앞 바다에 수이도(愁伊島) 혹은 수리도(愁里島)와 함께 묘사되어 있다. 수리도는 분도의 옛 지명으로 인근의 원도(猿島)나 사도에 비해 크기가 작은 섬이어서 똥섬이라고 불려 갖게 된 이름이다. 1870년 중반에 제작된 '화도진도'에는 사도 옆의 섬이 다른 지도와는 달리 분도(糞島)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사도는 <인천부사(仁川府史)>에 '개항기 서양인들이 스테이션-아일랜드(station island)로 부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축항 이전 제물포에 접안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는 큰 배들의 정박지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사도는 '오푼도'라 불리기도 했는데, 섬 인근에 정박된 배에서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5푼짜리 가짜 돈을 만든 것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팔도사도삼항구일기(八道四都三港口日記)>(1884년 5월 28일), 사도(沙島)에서 사주(私鑄)한 자를 엄벌할 것'이라는 문건에 보인다. 화도진의 별장 김굉신(金宏臣)의 사건 보고에 대한 조치를 내려 보낸 문서로 수신자는 인천부사다. 기록 중 사건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5월 25일 밤 화도진의 별파진 최용석(崔龍石)이 사도(沙島) 포구 주변의 수상한 선박을 조사하여 보니 동전을 주조하던 곳과 연장이 있었습니다. 이에 본 포구의 백성 김일갑과 함께 갔으나, 배 안의 일본인 2명이 검을 뽑아 휘둘러 최용석은 칼에 베이고 김일갑은 잡혀 묶인 후 구타를 당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사사로이 동전을 만든 것이라 관예를 내어 배 위의 조선인 유경복(柳景福)과 황희룡(黃喜龍)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편수 손치범(孫致凡)과 검을 휘두르고 도망한 일본인은 잡지 못하였습니다. (…)"

이 사건은 전환국이 서울에 설치된 1883년의 1년여 뒤의 사건이다. 당시 성행하였던 백동화의 위조 사례 중 하나로 육지가 아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도에 정박한 배 안에서 동전을 사주하던 현장을 화도진에서 적발하여 보고한 것이다. 이에 중앙정부는 친군전영(親軍前營)과는 별도로 인천부사에게 문서를 보내 사건을 엄밀히 조사할 것과 체포한 자들의 치죄, 도망한 손치범과 일본인의 체포 및 우리 법에 따른 처벌을 지시하고 있다. 또한 일본영사관에 이러한 사실을 통보하여 일본인을 엄하게 징계할 것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이 사건처럼 백동화의 밀수입과 위조 등은 통화량의 증가로 화폐가치가 폭락하고, 물가의 폭등을 가져와 사회문제가 됐다. 특히 전환국이 인천에서 운영된 1892년~1900년 동안에는 심각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도는 분도와 함께 1906년 설립된 일본인매립조합에 의해 시행된 인천공원 앞 해안 4만2957.4㎡의 매립 공사와 1911년~1918년의 갑문식 선거 제1도크 공사에 쓰일 골재의 채취로 섬의 원형을 잃게 된다. 1918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의 1/50,000 지형도(1917년 측도)에는 사도가 공사가 완료된 선거와 연결되어 있고, 다시 사도를 기점으로 순도제(馴導堤)의 건설이 예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섬의 원형은 잃은 채 인천항 안에 있던 두 섬은 광복 후인 1966~1974년의 제2도크 공사로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