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韓何雲, 1919∼1975)

전라도길 - 소록도로 가는길 - 한하운(韓何雲, 1919∼1975)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프랑소아 비용이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대신 그 자신의 가난과 비참함을 그대로 노래하여 삶의 보편적인 의미를 일깨워준 것처럼 천형의 삶을 아름다운 시와 한 방울의 눈물로 녹여냈던 시인 한하운. "시가 나에게는 제2의 생명이다. 아니 전 생명을 지배하고 있다. 소망을 잃어버린 어두운 나에게 스스로 백광(白光) 같은 빛을 마련해 주고, 용기와 의지의 청조(晴條)길로 나를 인도한다"라고 말했던 시인. 

김소월을 읽고, 박목월을 읽고, 조지훈의 고풍에 취해서 부연 끝에 매달린 풍경이 되고자 다짐하던 어린 나에게 '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라고 노래한 그의 시는 충격이었다. 이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그가 갔던 천형의 길을 들여다보며 나는 비로소 슬픔도 꽃이 되고 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하운의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종규(鍾奎)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4년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던 중 한센씨병(나병)의 악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서점을 경영하기도 하고 1950년 성혜원(成蹊園), 1952년 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 등을 설립, 운영하며 부평에 정착해 인천과는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소록도로 가는 길'이란 부제가 붙은 이 시는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실린 '한하운 시초' 13편의 시 중 한 편이다.

선자(選者) 이병철(李秉哲)은 '한하운 시초를 엮으면서'라는 글에서 그의 시를 처절한 생명의 노래요, 높은 리얼리티를 살린 문학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한 때 이념 논쟁에 휘말리기도 하고 숱한 고초를 겪으며 파란이 많은 삶을 살다가 1975년 3월2일 인천시 십정동 산 39번지에서 나병이 아닌 간경화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김포군 계양산 장릉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주병율 시인


주병율 시인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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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크지 편집주간 
▲경북 경주 생
▲1992년 <현대시>로 등단
▲고려대학교대학원 한국어문학과 졸업
▲현재: 도서출판 '생각과 표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