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예총 사무처장·시인
2012년 개봉 4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성공적인 영화로 충격을 주었던 '연가시'란 영화가 있었다. 다른 영화와 다르게 관객을 모으며 240만명의 역대급 순위를 기록하는 예상을 가능케 했던 영화 '연가시'는 학명으로는 'Gordius aquaticus'라고 한다.

곤충의 몸에 기생하는 가느다란 철사 모양의 유선형 동물로서 일명 '철사벌레'라고도 한다. 물을 통해 사마귀나 메뚜기 같은 곤충의 몸에 침투했다가 산란기가 되면 곤충의 뇌를 조정, 물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하게 만드는 벌레로 물로 다시 돌아가게 작용되는 시간이 곤충의 한 살이 기간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연가시는 어떻게 숙주의 뇌를 조정해 일어나는 걸까? 자세한 원리는 아직도 학자들의 숙제로 남아있는 모양이지만 메뚜기나 사마귀의 신경전달 물질과 구조가 같은 연가시는 곤충을 물가로 유인하는 신경조절 물질을 분비해 자살을 유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가시가 곤충 고유의 신경전달 물질과 비슷한 물질을 분비하기 때문에 곤충은 마치 자신이 의도해서 물을 찾아 간다고 착각한다"고 수의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실현가능성은 희박한 일이지만 가상의 시나리오를 써 본다면, 어느 날 안개 걷힌 새벽의 강가에 뼈와 살가죽만 남은 참혹한 몰골의 시체가 떠오른다. 전국의 하천에서 변사체들이 발견된다. 곧 인간의 뇌를 조종해 물속에 뛰어들도록 유도, 익사시키는 '변종 연가시'가 원인으로 밝혀진다.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방역당국은 감염자를 색출 격리수용한다. 그러나 격리 수용된 감염자들은 연가시의 조종으로 수시로 물을 달라고 아우성치며 물을 들이키고, 결국 물에 빠져죽기 위해 몸부림친다.

어느 때부턴가 우리는 제3의 식량자원으로 곤충을 먹기에 이르렀다. 한편 우리는 논에서 사는 일명 벼메뚜기를 기름에 볶아먹었던 일도 있었던 것이다. 다행인줄은 몰라도 인체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연구결과와 유충이 몸에 들어왔다 해도 사람의 몸에서 성충으로 자랄 가능성은 없다는 정설을 믿어야겠지만 물놀이를 두려워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을 생각한다면 또 하나의 변고가 아니고 무엇일까.

자연생태계의 혼란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이제 정설이 될 것 같은 실례를 든다면 동물들의 기생충에 있다는 것이다. 고양이의 몸에서 번식하는 톡소포자충은 고양이의 몸속에 들어가기 위해 일단 쥐의 몸속에 들어간다. 쥐의 신경을 조절하고, 쥐의 공포심을 누그러뜨린 후 쥐는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아 잡아먹힌다.

새의 몸속에 번식하는 촌충은 물속에 사는 가시고기의 몸으로 들어가 물 표면으로 이동하게 조정, 새에게 먹혀 새로 이동하는 예나 창형흡충이 개미의 몸에 기생해 뇌를 조정한 다음 풀끝으로 이동하게 만들어 초식동물이 풀을 뜯어 먹게끔 해 이동하는 끔찍한 자연의 현상이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한낱 기생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체내에 사는 기생충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크기도 작고 몸속의 영양분을 기생하며 먹는다 해도 무게는 쌀 한 톨의 크기에 불과한 100g으로 구충제만 복용하면 이상이 없다고 기생충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말한다. 만약 사람들에게도 생긴다면 그것이 영화에서처럼 물에 익사하는 가상의 현실이 생길지도 모르는 의구 뒤 벌써 사람의 뇌에 침투한 것 아닌가 하는 현상이 도처에 있는 것 같다.

예컨대 권세와 부를 위해 권모술수를 자행하며 가는 사람들이 그렇고 좌와 우를 넘나들며 출세(자리)를 위해 자기의 정체성을 버리는 인간들이 감염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한다. 정도(正道)를 버리고 사도(邪道)를 부끄럼 없이 택하며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7가지의 대죄목을 알면서도 저지르는 사람들은 이미 뇌를 조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노나라 재상을 할 때 공자가 '용서 못할 5악의 인물'이라 해 중벌(처형)을 단행했던 일은 덕치와 인의를 주장한 그에게 있어 예외적 일이기는 하나 그야말로 그 5악의 인물들은 이미 연가시의 유층이 숙주의 뇌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5악의 인물, 내 곁에 참으로 넘쳐나고 있다. 역사는 그물이다. 하늘의 그물 즉 천망은 이러한 자(者)를 놓치지 않는다. 연가시적(的)인 사람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