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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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가 꽉 막힌 것 같은 세밑이다. 일부에서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있기도 하지만 맛은 영 개운치 않다. 무엇을 위한, 무엇에 대한 승리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후 사정이 어찌됐건 자신들의 손으로 선택한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넣고 그 사회적 현상을 슬퍼해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면 그것은 분명 이성적인 사회가 아니다. 나는 민주주의는 법치와 대의제의 발전을 통해 성장하는 것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 광장은 더 이상 민주의 텃밭도 아니고 텃밭이 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고장 난 대의제와 법치를 바로 잡는 원천적인 동력이 광장에 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천적인 가치다"라는 주장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리의 정치는 영원히 광장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 동안 수없이 만들어냈던 광장의 정치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결과가 지금과 같은 법치의 후퇴와 대의제의 파행이 아닌가.

이 땅의 대의제는 광장이 요동칠 때마다 소위 '국민의 뜻'이라는, 이제는 듣기조차 역정이 나는 명분을 내세워 눈치 계산을 하고, 때로는 선동하고, 때로는 반성한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이합집산의 곡예를 통해 연명해 왔다. 그 과정 속에서 진영논리만이 심화했고 그 와류 속으로 법치는 침몰했다. 마침내 본질이 장사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언론들마저 그 회오리의 확대 재생산자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럼에도 이제는 이러한 모습이 모두 '국민의 엄중한 뜻'에 따라 바로 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는가. 만일 이에 대한 대답이 "그렇지 않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그를 '국민의 힘으로' 바로잡기 위해 언제까지고 광장에 나서야 할 것이 아닌가.

초점도 잡지 못하고 저질 쇼로 전락하는 청문회 따위에 이제는 멀미가 난다. 벌써부터 열지도 않은 과실을 따먹겠다고 혓바닥을 널름대는 잡룡(雜龍)인지 괴룡(怪龍)인지 하는 정치꾼들의 행보가 어지럽다. 오직 역겹다. 그들은 대체로 광장의 논리에 묻어가는 그저 광장 전문가일 뿐이 아닌가. 거기에서 무슨 희망을 읽을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사회의 정치가 보여주는 추한 모습의 원인으로 지적돼온 부덕(不德) 중에 가장 해묵은 죄목(罪目)이 "소통하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모름지기 여러 서로 다른 인간들끼리 모여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소통이야말로 바른 정치를 위한 제일의 미덕에 틀림이 없을 것이고, 주위와 소통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들은 애당초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것일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추론은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판에서도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들 중에 국민이나 시민과의 소통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시민)의 뜻을 받들고", "국민(시민)과 소통하는" 국정(시정)을 펼치겠다는 것이 한결같은 그들의 공약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현실 속에서 그러한 결실을 좀처럼 확인하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당연하게도 이러한 현상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나의 생각을 단도직입으로 이야기하기로 한다면, 정치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차고 넘치는 소위 '소신(所信)'들이 소통의 암초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무척 고답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인간의 이목구비는 항상 극도로 제한된 영역만을 감지할 수 있고 그렇게 감지된 결과 또한 온통 착각으로 덮여있게 마련이다. 언어는 사용하는 자의 변덕스런 감정에 따라서 하나의 사물을 정반대로 표현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한 사고뭉치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의 많은 문제에는 정답이 없고 역설적으로 인간에게는 믿음에 대한 자유가 생겨난다. 무지와 무능에서 비롯하는 소신과 신념이 미덕으로 전화(轉化)하는 이유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 각자에게 개방된 소신은 인간의 사회화를 가로막고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의 충돌을 조장하는 반사회적 요소로 작용하기 십상이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인류의 역사를 일관하는 모든 갈등과 분쟁의 원인인 것으로, 어쩌면 인류의 비극적인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러한 소신과 소통의 배반은 한 세상을 편안히 살다가고 싶은 생명들에게 그저 숙명이라고 받아들일 수만도 없는 과제인 것이어서 이 세밑의 묵상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얻는 화두가 '반성'이다.

할 수 있는 극한까지 지속하는 반성, 반성으로 정련된 신념, 그것이 그나마 이 어리석은 개인과 집단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반성할 줄 아는 인간끼리라야 사랑도 하고 소통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해넘이에 모두와, '광장'마저도, 함께하고 싶은 되새김이다.

/홍익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