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경제연구소 소장
사람마다 체감하는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대체로 인간의 역사는 환란의 역사다. 어느 지역 어느 시대랄 것도 없이 자연 재해뿐만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사건과 사고가 간단없이 인류의 생존의 뿌리를 뒤흔든다. 그래서 아마도 인생은 고해다. 어떤 경제학자는 인류의 역사를 갈등과 혁명의 연속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어떤 역사학자는 역사란 도전과 응전이라고 정리한다.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리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더라도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해도 좀 너무 지나치다. 차라리 자연재해나 외적의 침입이 있다면 마음 복잡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맞서 싸우고 극복해야 할 뿐일 테니까. 그런데 이건 뭔가하고 한 날, 문제를 풀어야 할 인사들이 끝도 없이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어차피 정답일 수 없는 것이 분명한 반쪽짜리 이념 따위로 패거리를 짓고, 그 힘으로 자리를 만들고, 국고와 기업의 주머니를 털고 있다. 역대 대한민국 정권 아래에서 이런 짓거리가 일어나지 않은 경우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그래서 혁명도 하고, 쿠데타도하고, 탄핵도 해보고, 개헌도 짧은 기간에 그만큼 했으면 할 만큼 해보았다. 대통령 중심제, 내각책임제, 상하양원제, 제도에도 없는 책임총리제 비슷한 것도 해보고, 대통령중심제만 해도 연임에, 세 번 연임, 5년 단임까지. 또 대선거구, 소선거구 등 도대체 이 나라에서 실험해보지 않은 정치제도가 무엇이 남았을까.

그런데도 왜 언제나, 어느 세력이랄 것 없이 모두 집권 말기에는 지지도가 땅바닥을 기듯이 곤두박질치고, 스스로 폐족이라고 고해성사를 해야 하고, 번번이 특검에 대통령 수사타령이 나와야 하는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분명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친인척과 측근의 비리는 우리나라 집권 세력의 예외 없는 구성 요소이고 대통령의 문건이 청와대 문밖으로 나온 것이 처음도 아니다. 어떤 대통령의 경우 문서들이 임기 말에 통째로 밖으로 옮겨졌다는 의혹은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로 잠복하고 있지 않는가. 아마 누군가는 "유엔에서 기권할지 말지를 북쪽에다 대고 물어봤던 집단들도 있는데 '순실이'에게 물어본 것쯤이 대수냐"라고 들이대고 싶은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뿐인가. 때 되면 조상 묘 옮기고, 유명 복술가 한 번쯤 '찾아뵙지' 않은 우리나라 정치인이 몇이나 될까. 그래도, 아무리 그것이 다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번 일이 가슴 속에 그냥 또 한 번의 쓰린 기억으로 쉽게 가라앉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지독한 고집과 불통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권이 일정한 지지도를 끈질기게 유지했던 것은 다른 정권에서는 볼 수 없었던 대통령 개인을 향한 국민들의 이유 있는 기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아픔의 정서를 자아내는 그의 개인사(個人史)를, 그의 고집을 만들어낸 한 고달픈 '인간의 조건'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친인척 없이 대한민국과 혼인했다는 미혼의 이 여성만은 깨끗할 것이라는 맹세를 조건 없이 받아들였을 법도 하다. 누구보다도 완강해 보이는 나라사랑과 지킴이의 자세는 다른 부덕들을 덮기에 충분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미덕들은 전례의 남성들이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기에 이 여성 지도자의 지속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회복시키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나의 생각들이 사실이라면, 지금 드러난 현실들은 두말이 필요하지 않은 배신이다. 우리가 정치인에게 배신당한 것이 어디 한 두 번이더냐하고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한 번 쳐다보면 그만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4년 동안을 굳세게도 대선불복에 매달려왔던 세력들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주었던 믿음이 유난히도 컸던 모양이다. 이토록 허탈하게 한숨짓는 거리의 인파들을 보면….

이제 어차피 물은 엎질러졌고, 힘 잃은 대통령의 입장에서 선택할 경우의 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미 반성문도 나온 상태고, 수순이 진행되고 있지만, 주변 확실하게 정리하고, 구원투수 제대로 골라서 그에게 많은 권한을 넘겨주고 국정 공백을 최소화 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나머지야, 그래도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니 자신을 포함해서 법이 정한 대가를 가감 없이 지불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자신의 능력보다는 상대의 실수를 먹고 파렴치하게 부활하는 우리의 정치 쪽에 있다. 스스로들도 "×묻은 ×꼴"에 오로지 권력의 접수에만 골몰하고 나라보다는 나와 패거리의 이익만을 선동하는 '순실이'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는 너무도 많지 않은가. 아, 정말 나라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