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교수
1. 최고결정권자는 비선을 통해 원로들이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공식 '정선'에 발탁해 함께 일할 동지들을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비선'이 마치 정선처럼 혹은 정선을 대신해 작동하고, 정선 지휘명령체계를 위협하거나 무너뜨리는 사태다. 이 경우 대개는 비선실세는 부정부패 온상이 된다. 정선 내에서도 정상적 행정명령지휘체계를 무시하고 최고결정권자가 결정을 하면, 그 정책결정과 관련된 행정체계 선상에 있는 행정적 합리성이 손상돼 권위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조직체에서 이러한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그런 결정이 파국을 몰고 오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상위 참모를 무시하고 특정한 하위 참모의 의견을 묻고 정책을 결정해 공지하는 데에도 밖으로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은 이유는, 그 상위 참모가 자리에 연연해 자신이 무시된 사태에 대해 침묵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자들은 대개는 간신이다. 최고결정권자는 충신과 간신을 구별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간신은 자리에 연연하고 그 직위를 활용해 패거리를 구축하고 재산을 비축하기 마련이다. 인사가 만사이다.

최고결정권자는 최측근에 비판(opposition)의 목소리를 용기 있게 말하는 인물을 배치해야 한다. 리더는 비판하는 참모를 가까이 두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종류의 리더십의 핵심조건이다. 달리 말하면, 리더는 비판의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리지 않을 때 파멸로 가는 악성 암조직, 위기의 독버섯이 어둠 속에서 활짝 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최고결정권자 인성이 중요하다.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하려면 용기가 필요한데 그 용기를 받아주는 귀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비판 목소리는 침묵 속에 시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타자의 목소리에 열려있는 인성은 어느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긴 생애과정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2. 박대통령은 비선, 최순실과 그 측근들을 신뢰해 그의 말을 수용하고, 적지 않은 구체적 정책결정을 단행해왔다. 최씨를 그렇게 신뢰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최태민에 이어 최순실에게도 거의 절대적인 신뢰를 부여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 섬세하게 추적해 보아야 한다. 최씨와의 친밀성 관계는 매우 긴 시간 동안에 걸쳐서 형성된 것이다. 청와대를 향한 권력의지와 '여왕이 되리라는 예언'은 박대통령으로 구체화되자 더욱 확고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관계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이기 마련이고 우리는 아직은 그것을 온전하게는 알지 못한다. 그 가운데에는 물적 조건들도 있을 것이다. 작금 주목받고 있는 미르 재단, 케이스포츠재단 등등에 대해서 이같은 맥락에서 분석될 필요가 있다.

'최순실의 아바타 박근혜', '박근혜는 식물대통령', 이런 종류의 담론이 줄을 잇고 있는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을 통찰하지 못한다. 박근혜는 대권을 향하는 결코 용이하지 않은 험로들을 거쳐서 지금 대통령의 자리에 있는 현실정치가이지 책임 없는 아바타가 아니다. 또한 무당 환원주의 담론은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개성공단의 폐쇄 조치, 사드의 졸속적 배치 결정, 일본 종군위안부 합의, 국정교과서 강행 등등 박근혜정부의 이데올로기 실체를 통찰하지 못하게 한다.

3. 시국은 심각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병준 교수를 국무총리후보자로 야당과의 협치 없이 지명했다. 이른바 책임총리와 거국내각 방안을 수용하는 듯한 흐릿한 이미지를 살짝 보여줬다. 그러나 박대통령의 지난 4일 '2차 사과담화문'의 그 어느 곳에서도 김총리 후보에 대한 언급이나 거국내각안을 수용하겠다는 구체적 발언을 볼 수 없었다. 그런 결정들은 어느 비선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냉담한 의문과 거친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야당들은 더욱 거친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박근혜 퇴진", "하야", "탄핵"을 외치는 국민 저항과 시국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고, 열기는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그런데 거국내각 발상 근거는 법이 아니라 '정치적 협상' 언어다. 사실, 거국내각의 이름으로 있었던 총리 권한 행사는 헌법상 부여된 국무총리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또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헌법 제86조 2항("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에 의할 때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지 않고서 행정각부를 통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부에서 총리가 행정각부를 통할할 수 있도록 일괄해 대통령이 국무총리에게 명을 내리면 헌법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식의 묘책을 내어놓는다. 이 묘책은 위헌적 궤변이다. 헌법에서는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대행을 할 수 있는 경우를 매우 명시적으로 적시("제71조,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