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된 루이14세는 1715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72년간 왕좌를 지켜 역사상 가장 장기 집권한 국왕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학자 보쉬에게 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배우며 자랐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태양왕'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그가 실제로 "짐이 곧 국가다"란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믿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군왕이었다. 루이14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재상을 맡았던 리슐리외와 마자랭 추기경은 종교적 관용과 실용적인 정책을 펼쳤기에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그러나 22세에 친정(親政)을 시작한 루이14세는 무리한 침략전쟁과 국왕의 사치로 국고를 바닥냈다. 그는 프랑스 전역을 32개의 징세구로 구분하고, 짐이 곧 국가인 왕국의 사활을 걸고 세금을 징수했다. 국왕은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세징수권을 경매에 부쳐 금융가들에게 넘겼고, 이들은 왕에게 상납한 금액만큼 아니 그 이상을 거둬들여 개인적으로 착복했다.

백성의 불만이 고조되자 질서를 유지하고 폭동을 진압할 상비경찰을 창설했고, 이들에게 지불할 급료와 훈련 그리고 제복 비용이 백성들에게 추가로 전가되었다.

프랑스 절대주의 왕정은 지방 귀족의 반란은 물론 그 어떤 민중봉기와 반란에도 대처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와 태세가 완비되어 있었다.

그에 더해 루이14세는 국민의 종교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왕정의 안보를 위해 유리하다고 판단해 1685년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교도들을 탄압했다. 이 때문에 25만 명의 위그노교도들이 인근의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들 대부분은 수공업 분야의 숙련공들이자 계몽적인 지식인들이었다. 이후 프랑스의 수공업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하였다.

그가 죽자 국민들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오래도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해방을 기뻐했다. 국가흥망에 무슨 비법이 있겠는가. 백성이 편하면 흥(興)하는 것이고, 그 반대로 하면 망(亡)하는 것이다.

/황해문화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