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수 인천남구청 문화예술과 전문위원
▲ 각국조계석 사진(인천시 문화재자료 4호) /사진제공=인천광역시립박물관

근대 동아시아의 개항장은 바다를 넘어온 서구 문명이 일방적으로 건설한 개척지나 식민지는 아니었다. 서구 문명은 보통 다른 문명권으로 팽창을 시도할 때, 혁신을 통해 얻은 선진 기술과 무력을 바탕으로 몇몇 연해의 거점을 점령을 하고, 이어서 내륙지역에 대해 정치·경제·군사적인 공세로 지배체제를 확대해 나갔다. 동아시아 3국의 개항 과정도 '함포 외교'의 전형을 띠며 연해 개항장을 거점으로 했지만, 동아시아 개항장의 근간에는 수백 년을 이어온 소통과 교류의 방식이 존재했다.

예전부터 동아시아의 각지의 왕조들은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華夷秩序)에 입각한 조공·책봉관계 속에서 소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구와의 교류도 이와 유사한 관계 속에서 완만한 속도로 진행됐다. 중국 광동(廣東)의 광주13행(廣州十三行), 일본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의 네덜란드 상관(商館) 및 당인 야시키(唐人屋敷), 부산 초량의 왜관(倭館) 등은 개항 이전부터 중국·일본·조선이 외국인에게 제한된 무역과 거주를 허락한 호시장(互市場)으로 개항장 제도의 기원이 되는 선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황은수 인천남구청 문화예술과 전문위원
1842년 청국과 영국 사이에 체결된 '난징조약', 1856년 일본과 네덜란드 사이의 '화친조약',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수호조규'는 동아시아 3국의 개항 '개국'을 알리는 동시에 모두 예전부터 내려오는 교류관계 및 교류지역을 확대·개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제 조선정부는 1876년 수호조규를 체결하며 이것을 근대적인 조약체제의 성립이 아니라 예전부터 내려오는 교린체제의 변형으로 오해했고, 기존의 왜관과 일본이 요구한 개항장 거류지도 혼동했다. 나아가 새롭게 설정되는 개항장의 해관 및 감리서의 관세 징수 및 행정체계 역시 조선후기 왜관 운영체계의 영향을 상당히 받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동아시아3국은 통상조약 체결과 함께 예전부터 내려온 무역제도를 폐지하고, 조약 체결국의 사람들에게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새로운 통상제도를 받아들이는데, 이를 조약항(條約港) 제도[Treaty Port System, '개항장(Open Port)'과 동의어]라고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인에게 부여된 거주와 통상의 권리인데, 개항장의 설정 목적 자체가 외국과의 통상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통상권은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는 권리로 해관을 통하면 누구라도 직접 대외 수출입 무역에 종사가 가능하다. 그리고 거주권은 개항장의 일정한 범위 내에 외국인 전용의 토지를 구획해 그들이 거주할 수 있는 ― 가옥 및 토지 매입(임차), 사원·병원·묘지 조성 등―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이 구역을 '조계' 또는 '거류지'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그곳의 행정권 및 사법권은 해당 영사나 자치 조직에 위임돼 있어 토착사회와 갈등의 소지를 낳거나 외교적 마찰의 발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같이 개항장 제도는 구래의 호시장을 기원으로 여기에 서구의 자본주의와 국제법이 더해지면서 동아시아에 특수한 제도를 낳았고, 청국을 시작으로 일본을 거쳐 조선에도 전파되고 확대됐다. 더욱이 유사 제국주의를 표방한 청국과 일본도 주변국에 본인들의 통상·거주 지역을 설정해 나갔고, 그 결과 조선의 개항장에는 다양한 조계가 출현했다. 일본 및 청국 전관조계를 비롯해 각국 공동조계가 들어선 인천 개항장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요컨대 개항장은 제국주의 열강을 위시한 서구 문명의 동아시아 진출의 교두보이자 세계 자본주의 물결을 최 일선에서 감내하고 극복해 나가던 상호 혼합된 공간이었다. 비록 무력을 동반한 불평등조약에 의해 개항장이 설정됐지만, 그 안에는 일정 부분 동아시아의 전통과 지역적 특성이 반영돼 변화해 나갔던 것이다. /황은수 인천남구청 문화예술과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