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문화편집장
▲ 황해문화편집장

해방 직후까지 인천에 거주하다가 미군 진주 후 인천을 안전하게 떠날 수 있었던 일본인 소곡익차랑(小谷益次郞)은 <인천철수지(仁川撤收誌)>에 당시의 분위기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글은 <황해문화>(통권30호, 2001년 봄호)에 수록되어 있다.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커다란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나 며칠 후 38선을 경계로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불안에 떨었던 일본인들이 비로소 안도했다.

당시 인천 부윤으로부터 "차후 조선정부가 조직되려면 아마 1년 후라야 될 터이니 그 동안은 지금의 총독부 정치가 엄연히 존속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 날의 일기에 "얼마나 상쾌한 뉴스인가. 오늘 미군이 상륙한다는 최대의 불안은 씻은 듯 날아가 버렸다"고 적고 있다.

1945년 9월8일 토요일, 미군이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상륙했다. 그날 오후 2시 경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려왔다. 상륙하기에 앞서 미군은 당일 환영은 불가하며 미국 국기를 게양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포고를 내렸고, 일본 경찰에게 당일의 치안을 맡겼다.

경찰은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에 총기를 발사해 많은 사람이 상하고, 2명의 조선인이 죽었다. 그날 죽은 사람 중 한 명은 인천의 노조지도자 권평권 위원장이었다. 9월13일 미군정에 의한 재판이 열렸지만, 미군 판사는 일본인 경찰대의 발포가 적합하였으며 탄환에 맞아 죽은 조선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결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萬人譜)> '권평권 편'에서 '그 죽음 쌓여 오늘의 모순에 이르렀다// 성조기가 가장 잘 보이는 이 땅에서/ 일장기가 가장 잘 보이는 이 땅에서'라고 노래했다.

지난 2011년 헌법재판소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의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선언했지만, 정부는 '치유금' 10억엔에 이 모든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덮으려 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얼마나 상쾌한 뉴스인가?' /황해문화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