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관객 700만명을 넘어섰다. 북한군의 일방적인 공격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대반격의 전환점이 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사 뿐 아니라 세계 전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유명한 작전의 하나다. 인천은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진 현장이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고 이를 기념하는 기념관도 있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을 인천차이나타운 및 화교와 관련지어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이 꽤 많다.

9월15일 오전 2시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면서 안전한 상륙을 위해 유엔군 함대는 현재의 인천차이나타운(선린동) 일대, 북성동 일대, 자유공원 일대에 엄청난 포격을 가했다. 이 선제 포격이 북한군을 제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포격으로 인해 인천차이나타운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그 대표적인 건물이 현재의 파라다이스호텔 근처에 있었던 산동동향회관이었다. 산동동향회는 산동성 출신 화교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상호부조를 위해 1891년 조직됐다. 당시 인천화교 가운데 9할은 산동성 출신이었기 때문에 산동동향회는 최대의 동향회 조직이었다. 산동동향회는 동향회관을 건축하고 1930년에는 붉은 벽돌의 멋진 건물을 증축했다. 건물 내에 산동성 출신 화교 자제를 위한 노교소학(魯僑小學)을 설치했다. 이 학교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광동성 및 강소성 출신 화교가 중심이 된 현재의 화교소학과 합병으로 사라지기까지 존속했다.

산동동향회관 내에는 당시의 화상이 갹출해 구매한 기선 이통호(利通號)를 경영하는 사무실이 있었다. 이통호는 월 4회 인천을 출발해 산동성의 연대와 위해를 왕복하는 1855t의 기선으로 인천과 산동성 간의 사람, 물건, 정보를 실어나르는 당시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이통호는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하고 만다. 산동동향회관은 해방직후까지도 이통호 관련 문서를 대량으로 소장하고 있었으며, 동향회 관련 문서도 다수 소장하고 있었다. 산동화교의 기록과 추억을 간직한 산동동향회관은 인천상륙작전 때의 함포 사격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산동동향회관뿐 아니라 인천차이나타운 일대 붉은 벽돌 건물에도 많은 피해가 발생했음은 물론이다.

인천이 북한군에 점령당한 것은 7월15일이며, 이때부터 인천상륙작전까지 약 2개월간 인천화교사회는 좌우이념의 혼돈 속에서 혼란을 겪었다. 인천의 화교 지도자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임시위원회를 설립하자, 인천화교로 공산주의자인 정만리(程萬里)가 인천화교구국회를 결성, 두 단체는 대립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유엔군이 인천을 탈환하자 공산주의자에 협력한 화교 '부역자' 색출이 벌어졌지만, 정만리를 비롯한 공산주의자 화교가 북한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체포된 화교는 없었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를 정상적으로 되돌려 주지는 못했다. 한국전쟁 이전 화교는 한국 민간무역의 약 7할을 독점했으며, 그 무역의 중심지는 인천차이나타운이었다. 산동성은 물론이고 동북3성, 상해, 홍콩 등지서 중국인 무역상이 인천차이나타운에 쇄도하자 차이나타운은 일제 강점기 때보다 더 번성했다. 인천의 대 중화권 무역이 활발히 전개된 데는 편리한 해상교통편의 영향이 컸다. 홍콩에서 소주호, 남창호, 사천호 등의 대형 정기기선이 정기적으로 입출항했으며, 산동성 및 중국 동북3성과는 소형 무역선의 왕래가 빈번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러한 정기 기선의 입출항이 완전히 정지되자 대 중화권 무역은 정돈상태에 빠졌고, 그 자리를 부산이 차지하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점차 안정을 찾아가던 인천화교사회는 1·4후퇴로 다시 큰 혼란에 빠졌다. 당시 한국 최대의 무역회사로 신포동에 본사를 둔 만취동이 배편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 것은 이 때였다. 동순동 무역회사의 직원 40명이 미군의 엘에스티(L·S·T)선으로 인천 해상으로 나가 대형선박으로 갈아타고 제주도로 피난을 간 것도 이 때였다. 동순동 사장 한봉명 씨의 아들 한성전 씨가 1953년 부산에서 인천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왔지만 동순동과 인천차이나타운은 폐허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한성전은 동순동의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고 생계를 위해 1957년 개업한 것이 현재의 풍미 중화요리점이다. 화교가 자장면 장사밖에 할 수 없게 된 이유의 하나는 바로 한국전쟁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이 작전 성공을 위해 큰 활약을 했던 한국인 첩보원들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과 인천화교, 한국전쟁과 한국화교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이 땅에 거주하던 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 본 인천상륙작전과 한국전쟁은 우리의 경험과 상당히 다를 것이다. 인천차이나타운은 한국 근현대사, 인천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지역의 화교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