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옥엽 인천시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인천 인구는 곧 300만에 진입한다. 인구만으로도 대한민국 제3대 도시가 됐다. 인구증가는 다양한 요인이 있고 이에 따른 여러 가지 분석의 결과가 도출돼야겠지만 분명한 것은 발전의 시금석이 되고, 인천이 기회의 땅임을 보여주는 사례임에 틀림없다.

'인천'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바다, 인천항, 월미도, 인천국제공항, 송도·청라·영종 등 경제자유구역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역사의 스펙트럼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사건이거나 최초의 사실 혹은 건축물의 역사적 잔재이든 근현대사의 중심에 인천 개항장이 자리하고 있다.

전근대의 빗장을 열고 제물포에서 진센(Jinsen), 그리고 인천으로 변화해 갔던 130여 년 근현대사의 경험이 인천 중구 개항장에는 남아 있다. 개항장은 '제물포'라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도시로 변모하면서 '진센'이라 호칭됐고, 광복과 더불어 다시 '인천'으로 정착되었던 역사적 공간이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은 동아시아 세계의 문호를 개방시켰고 개항은 기존 질서를 동요시키면서 중국, 일본, 조선에 생소한 역사적 경험과 시련을 수반했다. 중국은 1842년 영국과의 아편전쟁 결과 광동, 상해 등 다섯 항구를 열었고, 1860년에는 영국, 프랑스와 맺은 북경조약으로 천진을 개항했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을 통해 개항하면서, 1858년 통상조약에 따라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 다섯 항구를 개항했다. 조선은 1876년 일본의 무력적 강요에 의해 강화도조약을 맺고 부산(1876), 원산(1880), 인천(1883) 세 항구를 개항했다. 당시 동양 3국이 겪은 외압의 차이는 이후 근대제국, 반식민지, 식민지라는 각각의 길을 가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인천 개항장은 일본, 청국, 외국인들의 조계가 조성되면서 서양의 건축물, 시설, 제도 등 국제도시로의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되었지만, '제물포 정략'이라 불렸던 각국의 이권 쟁탈 와중에 일제강점기를 맞게 되고 '진센'이라는 굴절된 근대 도시를 체험하게 됐다. 그 질곡의 굴레는 결국 1945년 광복으로 종식됐지만 이후 도시 재건과 경제개발, 산업화라는 도전적 과제 속에 '인천'으로 자리했다. 그리고 오늘날 300만 시대 '광역시'로 비상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또 다른 개척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근대의 길목에서 인천은 천진과 요코하마와 같이 수도에 이르는 인후(咽喉)의 요지로서 개항됐다. 그 지정학적 역할은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인천의 희생을 철저히 담보한 것이었다. 최초 최고의 철도, 항만, 공항 등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던 인천의 지역적 위상은 결코 과소 평가돼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에 '인천 가치 재창조'와 '시민 주권시대'의 진정한 의미가 내재해 있다.
그런 뜻에서, 근대 개항장으로 해상교류의 정점에 있었던 인천의 역사적 흔적을 되돌아 보는 것도 이 시대 인천 가치 재발견의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