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민요의 여왕'으로 불리던 가수가 있었다. 민요의 여왕 이화자는 1915년 부평에서 출생해 변두리 술집에서 노래 부르던 여인이었지만, 워낙 노래를 잘 했기에 인근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소문을 들은 작곡가 김영파가 직접 찾아가 가수로 발탁했다고 하니 그 노래 솜씨가 정말 대단했던 모양이다. 김영파에게 발탁된 이화자는 1936년 <섬시악씨>, <뽕도 따고 님도 따세> 등을 히트시키며 일약 '민요의 여왕'으로 등극했고, <어머님전상서>와 <꼴망태 목동>은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이화자에게는 작곡가 김영파와 작사가 조명암이란 당대의 걸출한 음악인들이 곁에 있었다. <꼴망태 목동>은 김영파 작곡, 조명암 작사였다. 작곡가 김영파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가수 김정구의 친형이었고, 작사가 조명암(1913~93)의 본명은 조영출로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동방의 태양을 쏘라」와 대중가요 <서울노래>로 동시에 입상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 시인이자 작사가, 극작가 겸 연출가였다.
특히 조명암은 위의 노래말고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창>, <낙화유수>, <꿈꾸는 백마강> 등의 노랫말도 만들었다. 1948년 조명암이 월북하는 바람에 이화자, 김영파로 이어지는 환상의 트리오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민요의 여왕 이화자 역시 35세의 젊은 나이에 아편중독에 빠져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누구라도 미국의 영향력을 빼놓을 수 없고, 기지촌을 통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므로 구태여 외면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식민지 근대, 대중의 시름을 달래주었던 인천 음악인의 역사가 있다면 이 또한 굳이 외면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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