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문화마당 황금가지 대표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에 촬영지로 등장하면서 일약 유명해진 음식점이 사라베스(Sarabeth's)다. 무시로 방출하는 케이블 방송을 통해 얼핏 눈길을 주기는 했지만, 드라마 자체 보다는 섹스라는 단어가 풍기는 묘한 끌림에 한두 번 채널이 정지된 적이 있다.

그야말로 '김새는' 드라마였다. 워낙에 드라마를 안 보는 것도 그렇거니와 여자 주인공들이 섹시하지 않은 입담을 주절거리는 데에 관심이 없었다. 익숙지 않은 환경에 몰입하는 것과 창작 욕구를 되레 저해해 시간을 허비하는 자체에 대한 불편함에 시청거부 1순위였다. 어쨌든 뉴욕 센트럴 파크 남 쪽 쯤에 줄 대고 기다려야 먹을 수 있을 만큼 인기 많은 집이 사라베스다.

대한민국 유수의 기업들이 앞을 다투어 광고를 싣고자 돈다발 심지에 불붙이듯 들이대는 곳이 타임스퀘어 광장일대다. 원래 뉴욕 타임스 신문사가 있던 자리였다. 맨해튼 7번가와 웨스트 42번가 그리고 브로드웨이가 트라이앵글처럼 만나는데, 일명 세계의 교차로(Cross Road of The World)로 불리는 공간이다. 쉐이크 쉑(Shake shack) 햄버거 가게는 브로드웨이를 따라 웨스트 36번가 모퉁이 부근에 있었다. 오전 11시에 열고 오후 11시에 문을 닫는다 했지만, 불은 밤새 켜져 있고 번잡스러울 정도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4~6달러짜리 햄버거 한 개를 집어 들고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과 팁을 포함해 한 접시 40달러가 넘는 사라베스의 대표 간식 '에그 베네딕트'를 먹는 사람들 사이에는, 섞이지 못할 것 같은 기층(基層)이 한 도시 공간 안에 양존해 있었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반복될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인 '냉정과 열정 사이'의 기류가 오버랩 됐다. 그런 공간에서 엄격한 과거와 비현실적인 현실이, 암울한 미래를 힘겹게 떠받치는 거인 아틀라스의 고성(孤聲)들이 수시로 감지되기도 했다. 츠지 히토나리가 그린 남녀의 상징적 대립관계를 넘어 부와 가난, 강자와 약자, 자연과 인간 등등 여러 상황의 간극은 무한궤도 같은 운명이었을까. 양립의 불편함과 이로움을 동시에 체득하며 살아가는 문명의 땅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라 하기엔 가난에 처한 사람들의 괴로움이 더 컸음도 목도했다. 여자가 상처를 더 많이 입었고 약소국 내지는 약자들에게 더 많은 고통이 떠넘겨지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타산지석이라 하지 않는가. 반면교사라 하면 어떤가. 남의 살림을 보고 배우며, 좋은 것을 더 좋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간곡함을, 어느 때보다도 우리사회가 갈구해야 할 것이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기껏 먹을거리 타령장단 쳐놓고 긴장감 도는 휘모리로 몰아간 것은, 근간의 내외 상황들이 긴박하게 돌아가서이다. 풍문이면 좋았으련만, 세계 곳곳에서 IS관련 테러 소식들이 무방비의 약자들을 치명케 하고, 사드(Thaad)와 관련돼 한반도 주변정세를 냉각시켜 양날의 칼자루를 쥐게 만든 상황이 그렇기 때문이다. 약자의 그림자는 왜 그리도 길고 홀쭉한지, 가난과 그 처지를 겪어보지 않은 세대들에게 선배 세대는 일갈하고 있다.

찬반 의견은 민주사회가 가진 생동감 그 자체라 보는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민주적 절차가 무너지고 주변(국) 상황인식을 합리적으로 감지해내는 태도의 상실은, 아니 예(禮)의 상실은 존재감에 멸시의 딱지를 스스로 붙이는 것과 다름없어 보였다. 이에, 교토 인근의 교가미 사키나 아오모리의 사리키에 일 년이 넘도록 지역주민과 협의해 설치했다는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선례는 민주적인 사회의 교본이 아닐 수 없다.

약자 또는 천대받는 자의 얼굴표정에 숨겨진 저항의 불꽃은 이미 선험적 본능과 경험에 의해 학습된 거였다. IS 이름을 걸고 초개처럼 던진 목숨에는 거대한 체제와 그 억압구조에 대한 증오가 실제로 구현됐다는 점이 그 증거다. 타인의 목숨도 자신과 같이 소중했을 진데, 자신을 둘러싼 사랑만이 진실하다는 억지에 뭔가 더 큰 부조리함이 내재돼 있음이 간파되고 있다. 하나 같이 일반인 모습을 지녔으되, 그 잔혹함은 역사 기술 난에 빨갛게 밑줄 그어질 게 분명했다. 무엇이 이토록 잔인한 결과를 낳게 했는지 다시 한 번 되짚어야 할 희망목록에 구두점을 찍는다.

'사이'란 무엇인가. 간격이 될 수 있고 차이도 되며, 친함과 부동(不同)의 이미지를 동시에 포괄하는 추상의 정체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2달러짜리 맥도널드 햄버거를 쥐어주자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흑인 노숙자와 어제 만든 떡이어서 공짜로 드린다는 설명을 들은 할머니의 끄덕임 사이에 간극은 어떤 것일까. 한국과 미국 그리고 다국적이며 다각의 관계에 처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일까 아니면 또 다른 타인의 무리일까. 인간이란 단어를 다시 써보며 천형처럼 쓴 누군가의 가시 면류관을 슬쩍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