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일보 연중기획] 백운산 아지랑이 ~ 동강 낚시 '절경'
[인천일보 연중기획] 백운산 아지랑이 ~ 동강 낚시 '절경'
  • 이영태
  • 승인 2014.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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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정체성 찾기] 이영태의 한시로 읽는 인천 옛모습
6>영종팔경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1653~1733)은 인천 죽수리(竹藪里) 소암촌(疏巖村)에서 태어났다. 자는 仲玉, 호는 甁窩·順翁이며, 본관은 完山으로 효령대군 10세손이다. 168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성주목사, 금산군수, 청주목사, 동래부사, 양주목사 등 외직을 맡았다. 강화의 <강도지>와 제주의 <탐라록>을 엮을 정도로 자신이 거주했던 지방에 대한 생각이 각별했다. 그의 나이 79~81세 때에 <소성속록>을 엮었는데, 그 안의 <부해록>에는 영종도 주민들의 생활상이 漢詩 형태로 남아 있다. 그가 선정 및 詩化했던 오가팔영(五嘉八咏)은 영종팔경으로 지칭할 수 있다.

白雲晴嵐 백운산의 아지랑이
紫烟霽月 자연도의 비 개인 날에 뜨는 달
三玉落照 삼옥의 낙조
八尾歸帆 팔미도로 돌아드는 돛단배
迦羅課農 사찰의 농사일
瞿曇訪釋 구담사의 스님 방문
松山放牧 송산의 목장
桐江釣魚 동강에서의 낚시

작자는 소표제를 여덟 개로 선정하고, 각각의 소표제에 대해 7언시 3수와 5언시 2수 모두 40수의 한시를 남겼다.  

色堪爲染縷疑曇  빛으로 물들이니 실처럼 흐릿하고
滿壑晴氛醉似酣  골짜기 가득한 맑은 기운, 취한 듯 즐거워라
明滅每俄鴉舅幘  밝아졌다 어두워졌다하니 까마귀 머리와 같고
分合時露鼠姑簪  나누어졌다 합쳐지고 때론 드러나니 쥐며느리 비녀 같네
柔姿入霧猶蒸葉  유약한 자태 안개 속으로 들어가니 잎사귀에 김이 서린 듯하고
倦態隨風怳蔚益  권태로운 모습 바람을 타니 더욱 더 어슴푸레하네
最是流鸎梭擲密  나는 꾀꼬리 북처럼 오락가락하니
却將金織敵孤嵐  한줄기 아지랑이에 금실로 베 짜는 것 같구나 

백운산의 맑은 아지랑이(白雲晴嵐)가 영종팔경의 첫 번째이다. 백운산은 일제강점기에 그것을 기준으로 운남, 운서, 운북, 중산마을로 명명할 정도로 영종도의 주산이었다. 주산에 어려 있는 아지랑이는 고정적이지 않고 진함과 묽음(濃淡)에 따라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거나 혹은 나누어지거나 합쳐지거나 했다. 산 정상의 밑에 에둘러 있는 아지랑이가 마치 비녀 꽂은 듯하기도 했던 것이다. 다른 한시에서도 "소라 같은 산은 푸른빛을 머리에 이어 옥비녀를 꽂은 듯하네(翠戴螺鬟玉視簪)"처럼 백운산의 아지랑이가 절경이었다.

汐勢當曛急 조수는 저녁 되자 거세지고
風帆次第歸 돛단배는 차례로 돌아오네
櫓功方叫苦 노 젖는 일은 고통스러운데
屛畵反生輝 병풍그림 같은 바닷가 절벽은 도리어 빛나네
倘有田三頃 행여 세 이랑의 밭이라도 있었다면
誰探水四圍 어느 누가 사방이 물뿐인 바다를 찾으리오
堪怜漁海客 바다의 어부는 불쌍하기만 한데
何處覓天機 어느 곳에서 천기(天機)를 찾을는지

팔미도로 돌아드는 돛단배(八尾歸帆)가 영종팔경의 네 번째이다. 바닷가 절벽 앞을 지나는 돛단배는 팔경의 대상이 될 만하다. 절벽은 고정돼 있지만 돛단배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기에 병풍그림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작자는 절경을 감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의 배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어부의 고통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행여 세 이랑의 밭이라도 있었다면, 어느 누가 사방이 물뿐인 바다를 찾으리오'처럼 어부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있다. 八尾歸帆이 팔경일 수 있었던 것은 어부의 '노 젖는 고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셈이다.

吟笻先訪老瞿曇  끙끙거리며 지팡이 짚고 늙은 스님 찾아가니
獘衲何年結此庵  헤어진 장삼, 이 암자를 지은 것이 어느 해인가
堆寂逗雲窺色相  구름이 머무는 고요한 암자에서 만물의 모습을 엿보니
指空飛錫鎖烟嵐  허공을 향해 석장(錫杖)을 던졌는지 안개와 남기를 가두었네
禪心已啓藏龍鉢  선심(禪心)은 용을 바리떼에 가둘 수 있게 이미 열려서
大性猶期照佛龕  큰 깨달음이 불당에 비치기를 기약할 수 있네
工倒劫塵堪此腹  공부가 잘못되어 속세에 유혹됨은 이 몸이 감당하리니
未生顔目果誰探  안목도 생기지 않은 그대 과연 누가 찾으려나

구담사의 스님 방문(瞿曇訪釋)이 여섯 번째이다. 백운산 동북쪽 기슭에 위치한 구담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가 창건했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수되면서 용궁사로 바뀌었다. 작자가 살던 시기에는 구담사라 불렸으며 영종도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작자는 구담사의 스님과 종유(從遊)하며 막역(莫逆)하게 지냈기에 '큰 깨달음이 불당에 비치기를 기약할 수 있다'면서 동시에 '속세에 유혹됨은 이 몸이 감당'할 테니 '안목도 생기지 않은 그대 과연 누가 찾겠느냐'며 희작(戱作)을 하고 있다.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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