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감에 발로뛰며 300개 도판찾아
회화·사회적 의미있는 작품들 소개
4년간 집필 … 깊이있지만 쉽게 묘사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일도 흔치 않다.

사실·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탄탄하게 받쳐주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발로 취재하고 수집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재료를 모았다고 해서 미주알 고주알, 그 것을 모두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거대한 원석에서 아주 작은 보석 같은 자료만 뽑아내야 하는 것도 역사를 기록하는 자의 몫이다. 

   
▲ 인터뷰 /홍선웅 판화가

한국의 대표적 판화가 홍선웅(63)이 근대 한국판화의 역사를 처음으로 정리한 <한국 근대 판화사>를 펴냈다.

인천문화재단이 일부 지원한 이 책은 개항기인 19세기 말부터 광복을 맞은 20세기 초반 한국 판화의 역사를 다룬 '최초'의 것이다.

   
▲ <한국 근대 판화사>홍선웅 지음 288쪽 1만8000원 미술문화

"한국 근대 판화는 그 역사가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음에도 그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작가론이나 현대 판화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지요. 정말 우리나라의 근대 판화의 역사는 미미한 것일까, 의문을 품고 자료를 찾기 시작했어요."

홍 작가는 "많은 평론가들이 근대를 판화의 암흑기라고 규정하면서 정말 암흑기처럼 인식돼 왔다"며 "그러나 내가 연구할 결과 근대시기 훌륭한 작품이 많이 나왔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판화만 30여년을 해온 그는 일종의 역사적 사명감으로 우리나라 근대 판화의 역사를 찾아 곳곳을 발로 뛰어다녔다.

그의 구두는 경매시장, 헌책방, 박물관, 도서관 등을 누비느라 늘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고는 했다.

땀은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는 법. 그렇게 그는 300개에 가까운 근대 도판을 찾아냈고, 이후 4년여간 집필에 몰두한 끝에 한국 근대판화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되었다.

"개화기엔 연활자(납활자)의 도입으로 목판에 그림을 새긴 판목과 연활자를 같은 판에 앉힌 인쇄물이 등장했어요. 신문, 지리서, 교과서, 종교서, 농업서, 문화서 등에 목판화가 실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요. 당시엔 특히 초등학생 교과서에 목판화가 많이 실린 것을 알 수 있지요."

한국 근대사가 격랑에 휩싸일수록 판화는 역사와 좀 더 밀착한 모습을 보여줬다.

1920년대 우리나라 화단은 부르주아계급의 타파를 추구한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과 민족민술론으로 양분됐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순수주의 판화와 불안한 시대를 반영하는 판화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민족주의에 기조를 둔 창작판화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40년대엔 일제의 탄압, 좌우대립의 갈등이 심화하면서 판화는 문예지나 잡지 등 매체를 통해 많이 양산됐다.

"판화가 비로소 고유한 장르로 인정받은 것은 조선미술동맹 제1회 미술전을 통해서입니다.

목판화는 광복 후에도 계속해서 판화 장르의 우위를 점했고, 광복 뒤 판화에 나타난 사회주의 경향은 다분히 중국에서 일어난 신흥목판화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홍 작가는 이같은 한국 근대 판화의 도도한 흐름을 깊이가 있으면서도 쉽게 기술해 나가고 있다.

조선후기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이 책은 회화적·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판화만을 소개한다.

작가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작업했으며, 어느 매체에 실려 대중에게 전달됐는지를 작품의 이미지까지 보여주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근대 이전의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근대 이전인 조선후기부터 개화기까지 시기, 가장 중요한 목판화는 조선 지도와 세계지도였습니다.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앞장선 실학자들 덕택에 훌륭한 지도들이 제작될 수 있었지요.백리척 작도법에 의한 실측지도는 특히 뛰어난 판각기술을 보여주고 있지요."

경기도 안성이 고향인 홍 작가는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마친 뒤 평택고를 나와 중앙대 회화학과 72학번으로 입학했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였지만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겪으며 사회·정치적인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1982년 한국의 독보적 예술세계를 개척한 판화가 오윤과 친분을 쌓으며 판화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다.

노동자·농민 계급의 모습, 플로레타리아 해방 등을 파 내던 그의 조각칼은 이제 남북분단의 아픔, 민족의 평화통일을 향하고 있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표지의 작가, 홍선웅. 그의 작은 조각칼 날이 우주라도 빚어낼 것처럼 눈부신 빛을 발한다.

/글·사진=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