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 시대 강화도의 이름 '강도'… 몽골 침입 피해 천도
   
▲ 고려왕실이 머물던 고려궁지.


고려궁지·선원사지터 등 곳곳 유적·유물 산 교육장



1232년 고려왕조는 몽골의 침입을 피해 수도인 개성을 떠나 수십만명과 함께 강화에 닿는다. 고려왕조가 강화로 천도한 것은 침입자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발현한 것이었다. 이를 가리켜 한 역사학자는 '의로운 항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고려왕조는 이때 강화도의 이름을 '강도(江都)'라 짓고 '수도(首都)'를 세운다. '강화현'이었던 강화가 '군(郡)'으로 승격한 뒤 '강도'라 불리기 시작한 시점이다.

'강도의 시대'는 정확히 1232~1270년을 가리킨다. 고려왕조가 몽골(元)과의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한 뒤 저항한 39년간이 바로 수도였던 시기다.

고려는 이 기간,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감히 대적할 수 없었던 몽골에 맞서 장장 39년간 처절한 전투를 벌인다. 고려왕조가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에도 최후 저항세력인 삼별초는 자신들만이 진정한 고려인임을 자처하며 몽골에 끈질기게 항전한다.

1270년 강화에서 진도로 간 삼별초는 다시 제주도로 건너간다. 최후의 순간으로 알려진 1273년에도 삼별초는 소멸하지 않고 일본 오키나와로 향했다. 1270년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의 기와가 오키나와에서 발견되는 것이 그 증거이다.

몽골군과 고려의 싸움은 한마디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몽골이 거대한 해일처럼 세계대륙을 집어삼키던 시기, 동양의 작은 나라 고려가 무릎을 꿇지 않고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버텼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강화도에 도착한 고려인들은 내성 외성 중성을 쌓았고 민족의 대불사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된 '팔만대장경'을 완성한다. 그렇게 8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강화도에선 고려왕조의 흔적을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다.

고려왕실이 머물렀던 '고려궁지'와 팔만대장경을 탄생시킨 '선원사지터', 800년의 기품이 흐르는 '봉은사지 5층석탑'은 빛나는 고려의 예술혼으로 피어오르고 있다.

고종이 잠든 '홍릉'과 왕비들의 무덤, 당대 최고 문장가 '이규보의 묘'와 같은 고분에서는 찬연한 고려의 영혼이 빛나고 있다.

/김진국기자 freebird@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