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종착점 역사 속 도도히 흐르는 경항운하
   
▲ 여전히 강남운하를 통해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고 간다. 상해 인근의 주가각에서는 베니스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며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1920년대부터 다양한 견문 기록

연장 길이 1782㎞ … 6구간 연결체

물자교류 동맥·거대 수운교통로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자 출발점, 그리고 중국역사의 산증인 경항운하는 오늘도 남과 북을 도도히 흐르고 있다.

대운하라고 불릴만한 장거리 인공운하의 시작은 청대이지만 이것을 남단인 항저우에서 북단인 베이징을 연결하며 전국적인 남북 유통망으로 기능한 것은 베이징이 중국의 실질적인 수도로 정착된 원대부터였다.

이후 대운하는 명·청시대까지 경제적 중심지였던 중국 강남지역과 정치적 중심지였던 베이징을 이어주는 남북 물자교류의 동맥이자 주요한 수운 교통로의 역할을 담당했다.

더욱이 중국의 주요 하천이 대부분 동서방향으로 연결하고 있는 한편 명·청시대는 바닷길로의 교역이 사실상 중단된 해금정책이 강고하게 유지돼 있던 터라 남북방향으로의 수로 유통은 사실상 대운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대운하는 늘상 조량을 운송하는 조운선과 남북을 왕래하는 관료들의 선박, 각지에서 몰려드는 상인들의 선박으로 가득 차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베이징으로 올라가는 동남아나 서방의 사절뿐 아니라 베이징을 거쳐 남방으로 여행하던 외국이 탑승한 선박도 다수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인천일보는 인하대학교와 함께 경항운하에 대한 연중기획을 진행한다. 먼저 경항운하를 바라 본 역사 속 이방인들의 시선을 조영헌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전임강사의 '견문록을 통해 본 원·명·청 시대 대운하' 논문을 중심으로 들춰본다.



▲대운하를 기록에 남긴 외인들

원대부터는 서방 기독교 세계에서 인도나 중국을 비롯한 동방으로의 관심과 접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중국을 방문하는 사절단이나 상인들이 증가했다.

명·청시대에도 조선이나 동남아 각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종공사절이 이어지면서 당시 중국에 대한 견문 기록 역시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견문록 가운데는 대운하를 경유하는 과정에서 보고 느낀 사실에 대한 외국인의 독특한 관점이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원대의 대운하에 대해서는 1274~1290년 베이징에서 대운하를 따라 남하하면서 기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동방견문록과 함께 대표적인 유라시아 견문록이라 할 수 있는 이슬람 탐험가 이븐 바투타의 기록, 교황사절로 1322년부터 1328년까지 중국을 방문했던 이탈리아의 오도릭 프란체스코 수사의 기록 등이 있다.

명대의 대운하에 대한 자료는 원대보다 풍부하다. 특히 조선인 최부와 포르투갈인 마테오 리치의 견문록이 대운하에 대한 상세하고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조선인 관리였던 최부는 1488년 제주도를 출발해 전라도로 가는 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 절강 영파에 표착하는데 왜구로 오인받아 베이징으로 압송된다. 이 과정에서 최부는 중국인과의 필담을 통해 대운하와 연변의 도시에 대한 풍경, 대운하를 이용하는 관리, 조운선에 대한 풍부한 기록을 남겼다.

최부보다 100여년 뒤인 1582년 중국을 방문했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로 리치는 1610년 사망할 때까지 30여년 동안 중국에 머물며 각종 기록을 남겼는데 특히 난징과 베이징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대운하와 도시, 교통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밖에 직접 대운하를 이용했던 경우는 아니지만 16세기 중국 남부지역을 왕래하며 보고서를 남겼던 포르투갈·스페인 선교사들의 기록도 당시 중국의 교통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청대에는 서양에서 중국으로의 진출이 증대하면서 이와 관련한 보고서 기록도 증가한다.

크게 3가지로 분류하면 러시아측 자료로 예루살렘 대주교의 추천으로 러시아 사절단의 일원으로 1675년 중국을 방문해 1676년 베이징에서 강희제를 친견한 루마니아 출신 밀레스쿠의 기록과 명대부터 중국에 진출했던 외국인 선교사들 기록, 산업혁명 이후 인도와 중국진출을 확장해 온 영국측 기록들이다.

이는 중국인의 시각에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 대운하의 다른 측면을 볼 수 있으며 특히 직접 선박을 타고 대운하를 이용하는 과정을 그려냈던 외국인의 기록은 원·명·청대 대운하의 구체적인 운영과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대운하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1782㎞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수로, 경항대운하는 오늘날 하나의 운하로 흐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여섯 구간으로 나눌 수 있는 중·소규모 운하의 연결체라고는 보는 것이 타당하다.

먼저 항저우와 전장을 잇는 강남운하는 항저우를 비롯해 쑤저우, 우시, 창저우, 전장까지 이른바 수향으로 불리는 강남지역을 관통하는 운하로 대운하의 최남단이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수많은 강남의 도시와 향촌을 연결하는 물류의 동맥구실을 하고 있다.

견문록에서도 강남운하를 경유하면서 만나게 되는 도시와 물자유통에 대한 설명이 많이 담겼다.

이처럼 강남지역에서 수운 유통이 활발하게 진행되다 보니 명 중기 이후로는 운항 선박이 많아 지체현상이 빈번하게 발생되기도 했다.

명대 쑤저우를 향해 남하하던 마테로 리치 일행은 전장에서 쑤저우를 왕래할 때는 운하가 좁은 반면 왕래하는 선박이 많아서 손수레차를 이용하곤 했다고 견문록에 남겼다.

실제 강남운하 중에서 전장과 쑤저우를 연결하는 구간은 지류가 부족해 겨울에는 수원이 부족할 때가 잦았고 명말에 출간된 소설에서도 이 구간을 이용하는 조운선이 많아 상선은 우회로를 선택했다고 적기도 했다.

강남운하의 북단인 전장을 통과한 선박은 양쯔강을 도강한 뒤 회양운하로 진입하게 된다.

양쯔강의 폭은 11㎞에 달하고 풍랑이 거칠기에 왕래하는 선박은 강남에 위치한 전장이나 강북에 위치한 고주에 정박하면서 선박을 교체하거나 만조가 될 때를 기다리곤 했다. 이에 대해 오드릭은 "세계에 존재하는 강 가운데 가장 길다"면서 "가장 좁은 곳도 폭이 7마일이나 된다"고 지적했다.

원대의 마르코 폴로는 양쯔강 가운데 금산이라 불리는 바위섬을 가리켜 "금산 위에 우상숭배자들의 절이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200명의 수도승들이 있다"고 적고 있다.

양쯔강을 건너자마자 만나는 진양운하의 남단은 고주인데 이곳에는 강남운하에서 올라온 선박뿐 아니라 양쯔강을 따라 내려온 선박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마테로 리치는 "양쯔강에서 온 사적인 상선은 진양운하로의 진입을 허가하지 않았지만 이 운하의 북면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예외"라고 설명하면서 이는 황제에게 전달되는 조운선의 운항에 장애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제한은 운하를 이용하는 선박이 워낙 많았기 때문으로 16세기 후반 총리하도를 맡았던 만공의 기록에 따르면 대운하 운항의 우선 순위는 조운선, 조공선, 관선, 그리고 민간인들의 상선이라고 밝히고 있다.

회양운하는 운하와 자연 하천의 중첩으로 인한 잦은 범람이 특징이었다.

양장가와 회하를 잇는 회양운하는 소백호, 계수호, 백마호 등의 큰 호수가 연결된 침수지대로 큰 호수가 사방으로 끝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청대에 회양운하를 지나던 안데르손은 운하와 제방으로 격리된 호수가 너무 광활하여 마치 바다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김칭우기자 chingw@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