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의 시대
3. 한국의 운하, 경인아라뱃길로 새 역사
   
▲ 2011년 완성된 경인아라뱃길은 굴포천을 거쳐 한강을 연결하는 대한민국 최대 운하다. 고려 고종 때 시도된 뒤 800년만에 완성됐다. 개통을 기념하기 위한 마라톤대회가 열렸다. /인천일보 자료사진


고려, 수송로 확보하려 인천 앞바다 - 한강 연결 시도

태안 '쌀썩은여' 조운선 침몰 잦아 … 안면도 굴착 성공

2011년 경인아라뱃길 개통 … 홍수 예방·관광명소 각광




근대사회에서 조운은 국가통치에 필수적인 요소의 한 분야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은 왕조 초기부터 조운이 제도화 되었고 이후 발생하는 문제점과 폐단을 보완해 나갔다. 국가의 재정이 주로 삼남에서 공급되었기 때문에 조운의 경로는 무엇보다 국가적인 관심을 모았다.

경로에 놓였던 태안반도는 각 시대마다 연례적으로 조운선이 침몰되는 대형해난사고가 발생했고 미곡과 선박의 침몰에 따른 재정적 손실로 국가와 사회의 혼란이 계속됐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태안반도 연안에 대한 운하를 파겠다는 계획은 계속 됐다. 결국 한국의 운하는 조운의 안전한 공급을 위해 계획됐고 실제 실행됐으며 일부 성공하기도 했다.

경인아라뱃길로 결실을 맺게 된 한국의 운하에 대해 알아본다.


▲안면도 굴착

태안반도의 안흥량과 관장목 이외에 현재의 안면도 남단에 해당하는 안면곶도 조운선이 침몰되는 사고가 많았던 곳이다.

현재 태안군 안면읍 신야리의 남서쪽 끝을 '쌀썩은여'라는 지명을 붙인 것도 조선시대 곡식을 운반하던 배들이 마을 앞의 암초에 부딛혀 파선해 쌀이 많이 썩었다라는 것에 유래한 것이다.

안면곶의 쌀썩은여는 안흥량과 유사하게 빠른 조류와 1㎞에 이르는 암초지대, 계절풍 등의 기상의 영향을 받기 쉬운 지역이기에 항해술이 미비했던 조선시대까지 해난사고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쌀썩은여 등 조운로상의 위험지역을 피하려는 목적에 따라 태안반도를 피해가기 위한 굴포운하와 의항운하 굴착시도가 있었다.

두 곳에서의 운하 굴착공사는 모두 파는대로 무너지는 바람에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의항운하의 굴착은 중종 31년 9월에 처음 제기돼 11월에 정책을 결정하고 이듬해 2월 역사가 준공된다.
5000여명의 승려를 동원해 2㎞ 가량을 굴착하는 역사였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성급하게 작업을 완료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시도에도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굴포운하의 경우 거대 암반이 생겨나면서 굴착을 포기하게 된다. 사정이 이렇자 조선의 위정자들은 쌀썩은여라도 피하겠다는 목적으로 안면도 굴착에 들어가 성공하기에 이른다.

인조 연간(1623~1649)에 태안 오전 방경령이 충청감영에 건의한 것이 계기가 된 정설이나 안면도 굴착에 관련된 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17세기 후반에 반도의 가장 좁은 구간인 현재의 태안군 안면읍 창기로와 남면 신온리 사이를 굴착해 운하를 완성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천수만의 해저는 암반으로 형성돼 있으나 암초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 선박이 자유롭게 항해하기에 유리한 해역이었고 특히 안면곶은 천연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그동안 태풍과 해일로 인한 피해가 없는 천혜의 조운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따라 안면도는 반도가 아닌 섬이 됐고 조운선의 항로도 원사도-쌀썩은여-안흥량-광장목에서 원산도-천수만-안면도굴착지-안흥량-관장목으로 바뀌게 된다.
 

   
▲ 아라뱃길 전경.



▲경인운하의 실패와 경인아라뱃길의 탄생

'중종실록'에는 조선 중종(1534)때 우의정 김안로가 "한강에서 부평뜰까지 40리(약 15.7㎞)의 물길을 여는 데 성공했지만 (폭 400m의 돌산으로 이뤄진) 원통현(圓通峴)을 뚫지 못해 실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원통현은 현재도 '원통이고개'로 불리며, 인천시 부평구 부개동 46번 국도상에 위치한다. 실록은 또 "(원통현이) 천험의 지역인데 어찌 인력으로 뚫겠으냐"며 이를 뚫으려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라고 적고 있다. 과거인력, 기술의 한계로 이루지 못한 경인아라뱃길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염원이 아직도 지명으로나마 남아 있는 것이다.

최초의 경인 아라뱃길 개척 시도는 800여년 전인 고려 고종 때다. 당시 각 지방에서 거둔 조세를 중앙정부로 운송하던 조운(漕運) 항로는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염하를 거쳐 서울의 마포 경창으로 들어가는 항로였다. 그러나 염하는 만조 때만 운항이 가능했고, 강화군 불은면 광성리 해안의 손돌목은 뱃길이 매우 험했다고 한다.

당시 실권자인 최충헌의 아들 최이는 안정적인 조운항로를 개척할 목적으로 손돌목을 피해갈 수 있도록 인천 앞바다와 한강을 직접 연결하기 위해 인천시 서구 가좌동 부근 해안에서 원통현(일명 원통이고개), 지금의 굴포천을 거쳐 한강을 직접 연결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운하를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운하건설이 계속 추진됐지만 기술의 한계로 좌절되다 지난 1966년 서울시 영등포구 가양동에서 인천시 서구 원창동 율도까지 총연장 21㎞, 수심 4m, 하폭 90m의 운하 건설이 추진된다. 그러나 경인지역의 급격한 도시화와 지역개발로 시도 자체가 무산된다.

그러다 1987년 굴포천유역의 대홍수로 큰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하자 방수로를 신설해 홍수량 일부를 서해로 방류하는 내용의 굴포천 치수대책을 수립하게 된다.

인천의 계양, 부평, 경기의 부천·김포 등 굴포천 유역은 40%가 한강 홍수 위 이하의 저지대로 평상시에는 하천물이 한강으로 흐르나, 홍수시에는 한강수위가 굴포천 수위 보다 4m 이상 높아 자연배수가 불가능해진다.

100년 빈도로 발생하는 대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서해로 직접 방류하는 방수로건설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방수로만 건설할 경우 홍수 발생시에만 사용하는 임시수로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또 방수로 시작점인 굴포천유역에서 한강 쪽으로 조금만 더 연결해주면 홍수대비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운하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홍수예방을 위한 대량수송로 확보와 평상시에는 운하로 사용하기 위해 1995년도부터 경인운하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애초 민자사업자까지 선정해 사업이 탄력을 받는 듯 했지만 환경단체의 반대와 경제성 논란 등으로 사업은 수년간이 지연됐고 굴포천유역의 홍수피해가 계속되자 경인운하사업은 잠정보류되고 임시방수로공사만 우선 착수하게 된다.

이 후 오랜기간 동안 경인운하 사업계획 및 타당성에 대한 재검토가 계속되었고 두 번에 걸친 용역수행 결과 타당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됨에 따라 2008년 국가정책조종회의에서 민자사업에서 공공사업으로 전환해 사업시행자를 K-water로 변경하면서 2009년 드디어 첫 삽을 뜨게 된다. 2011년 마침내 국민들 앞에 경인아라뱃길이 탄생하게 됐다.


▲물류거점, 관광으로 사랑받는 경인아라뱃길

2011년 경인아라뱃길 개통과 함께 인천이 개발하고 있는 관광자원의 하나가 정서진이다. 일출과 일몰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서해 제일의 관광명소로 개발되고 있다.

아름다운 서해낙조를 배경삼아 가족, 연인들이 추억을 만들며 여가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곳이다. 경인아라뱃길은 자동차는 물론 한강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있고 김포갑문에서 유람선 여행도 가능하다.

24층 높이의 전망엘레베이터가 있고 23층은 전망대, 24층은 아라카페와 옥외데크가 설치돼 있다. 1층에 있는 홍보관에서는 선박의 역사와 구조에 대해 살펴볼 수 있으며 간단한 선상체험도 할 수 있다. 자세한 정보는 경인아라뱃길 공식 홈페이지(http://www.giwaterway.kr)를 통해 알 수 있다.

/김칭우기자 chingw@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