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 침략대비'요새·미로화'에도 고통지속
'수려한 자연경관·건축물'관광객 눈길 사로잡아
   
▲ 몬테네그로의 항구도시인 페라스트 도시의 전경.


8 몬테네그로 코토르

고대 인류의 길은 육로였다. 인류가 직접 걸어서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육로는 소, 말, 낙타 등 동물을 이동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더욱 발달하였다. 마차가 활용되자 길은 더 멀리까지 이어졌고, 예전보다 더 빠르게 사람과 물건이 오갔다. 보다 빠른 길로 사람들이 모이고 교역량도 그만큼 많아졌다.

하루 종일 사람구경도 못하던 길이 생필품이 오가고 정보가 흐르는 요충지가 되었다. 그러자 한 무리의 도둑들이 생겨나 길목을 노리고 오가는 사람들과 물품들을 강탈했다. 수렵과 농경생활을 포기하고 노략질로 편하게 살 수 있었다.

드디어 여기저기서 도둑들이 생겨나 중요한 길목마다 자신들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통행료와 보관료, 숙식비 등 다양한 방법으로 뜯어갔다. 모든 육로가 도둑들로 들끓어 교역은 물론 사람들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인류는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아갔다.

별과 바람을 연구하고 항로를 개척하여 바닷길을 만들었다. 목적지까지 순풍에 돛을 달고 쏜살같이 도착할 수 있었다.

배는 더욱 커지고 바닷길은 번성했다. 그러자 바닷길에도 한 무리의 해적집단이 생겨나 길목을 노리고 오가는 배들을 납치했다.

평생을 도둑질로 살아온 자들과 해적질밖에 할 수 없는 자들이 모여 사람들을 잡아 노예로 팔고, 물건을 강탈하여 자신들의 이득을 챙겼다.

바닷길도 해적들로 인하여 안전한 통행이 어렵게 되었다.

몬테네그로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디나르알프스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악국가다.
 

   
▲ 몬테네그로는 지중해에 인접한 산악국가로 일교차가 커서 곳곳에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몬테네그로라는 국명은 중세시대 베네치아왕국의 지배를 받을 때 붙여진 것이다. 세르비아어로는 '츠르나 고라'라고 하는데, 이는 '검은 산'이라는 뜻이다. 디나르알프스산맥의 경사면에 가려 어두운 산지가 많은데서 유래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 산등성이의 바위들이 대부분 검은 색이다.

10세기까지는 동로마제국의 가신국이 되어 자치권을 행사하였고 14세기 중엽에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오스만트루크의 지배 아래 놓였고, 19세기 후반에 러시아가 트루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독립국이 되었다.

양대 세계대전으로 이탈리아, 독일 등에 핍박당하다가 티토 대통령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유고연방의 주축을 이루는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의 내전, 코소보사태 등에 개입해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제재를 받자 국민투표를 통해 2006년 독립을 선포했다.

아드리아 해는 예로부터 해적이 많기로 유명하였다. 특히,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여 해적들의 은신처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몬테네그로의 코토르는 해적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아드리아 해가 육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해안도시이기 때문이다. 천연의 요새인 까닭에 코토르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제국 시대인 유스티아누스1세 때 요새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중세 세르비아왕조 때 1747m의 로첸산 중턱을 병풍처럼 감싸는 4.5㎞의 성벽이 완성되었다.
 

   
▲ 중세시대 코토르는 도시 전체를 지켜기 위해 높이 20m의 성벽이 4.5㎞에 걸쳐 둘러싸여 있다. 성벽 안에는 중세 건축물이 오밀조밀하게 건축돼 있는데 좋은 골목길은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 미로처럼 구성돼 있다.


기독교의 포교는 성직자의 몫이다. 하지만 이슬람교의 포교는 일반 신자의 책무다. 이런 까닭에 '한 손엔 코란, 한 손엔 칼'이라는 말은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 무슬림신자들이 이교도들을 칼로 협박하여야만 쉽게 포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령지의 사람들이 개종하면 세금을 면제해주었던 것도 이런 연유다. 그러므로 무슬림 해적은 해적질 자체가 악이 아니라 포교활동이자 생업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제국이 멸망하자 지중해를 둘러싼 주변 해역은 해적들로 넘쳐났는데, 이때 가장 맹위를 떨친 해적들이 바로 '사라센' 즉 무슬림 해적들이었다.

수도원은 해적들의 주요 표적이었다. 수도원에는 청빈한 성직자들이 천국에 가길 원하는 신자들의 헌금과 기증받은 유산이 보관되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세 수도원은 지방주교나 봉건영주도 손댈 수 없는 독립조직으로 오직 로마 교황의 명령에만 복종하였다.

수도사는 원칙적으로 독신으로 급료도 받지 않아서 수도원의 재산은 해가 바뀔수록 부유해졌다. "수도원들 중에서 예수회는 박사가 많고, 프란체스코에는 돈이 많다"는 말처럼 수도원 중에서도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가장 부유하였다고 한다.
 

   
▲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코토르 성의 유명한 트리푼 대성당의 모습. 이 성당은 도시의 수호성인 성 트리푼을 기리기 위해 1166년에 건축된 것이다.


해적들은 수도원을 습격,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쳐들어가서 뺏고 죽이고 모조리 태워버리겠다'며 먼저 말로 협박하였다. 수도원은 이에 겁을 먹고 금전을 주고 타협했는데 이 일은 항상 반복되었다.

이에서 벗어나고자 수도원들은 점차 수도원의 구조를 요새처럼 만들었다. 교회 또한 해적들의 표적이었다. 도시에 해적이 침입하면 교회를 피난처로 생각하고 피신하였는데, 이는 해적들이 사람들을 생포하여 노예로 팔아먹는 아주 손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이처럼 도시를 요새처럼 만들어도 해적의 습격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코토르는 도시구조를 복잡한 미로로 만들었다.

골목은 비좁고 어두우며 갑자기 빈터가 나온다. 그리고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다. 이 길은 모두가 도시 밖으로 탈출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길목을 봉쇄하면 독안에 든 쥐 꼴이 된다.

코토르는 도시 전체를 지켜주는 성벽을 배경으로 중세의 건축물이 오밀조밀하게 있다. 그 중에서도 성 트리푼 대성당이 으뜸인데, 이는 이 지역의 수호자로 여겨지는 성 트리푼을 기리기 위해 1166년에 건축된 것이다.
광장 중앙에 있는 종탑도 코토르의 상징물이다. 이처럼 아드리아 해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가진 코토르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1979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성 트뤼폰 성당을 포함 건축물의 2/3가 파괴되며 위험에 처한 세계위기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후 적극적인 복구사업이 진행되어 2003년에 위기유산에서 해제되어 오늘날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거듭나고 있다.


 

   
▲ 페라스트 앞 바다에는 두 개의 섬이 떠 있다.'바다의 여인'이라 불리는 인공섬 앞으로 배한척이 유유히 지나가고 있다.


항구도시 '페라스트'

슬픈사랑 깃든…아름다운 인공섬

코토르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거리에 인구 350명의 항구도시 페라스트가 있다. 이 도시는 앞 바다에 있는 두 개의 섬으로 인해 더욱 유명한데 그중 하나는 인공 섬이다.

인공 섬에는 푸른색 지붕의 성모성당이 있다. 1452년 2명의 베네치아 선원이 바다 위의 한 작은 바위 위에서 성모상을 발견한 곳으로, 그로부터 오랫동안 주민들이 돌을 실어 날라 이곳에 섬을 만들고 성당을 세웠다.

자신들을 해적들로부터 지켜주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것이었다.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번 증축된 성당 안에는 해양 도시의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다. 그중 특이한 것은 한 여인의 애절함이 베인 성모상 액자다. 고기잡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평생을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용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두 섬의 성당과 수도원에는 이루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의 전설도 내려온다. 페라스트를 점령한 프랑스 군인이 이곳에 살고 있는 한 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어느 날 군인은 명령에 따라 그녀가 사는 마을을 포격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알려주지 못한 까닭에 사랑하는 처녀는 죽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군인은 괴로움에 슬퍼하다가 결국 수도사가 되어 죽을 때까지 이 섬에서 그녀만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한다.

▲ 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