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치하'40여년간 지속 유럽'최빈국'불명예
'민주화 바람타고 재도약 … 범죄·부정부패'난제'
   
▲ 발칸 최빈국 알바니아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 비좁은 비포장 도로를 정비해 도심 곳곳이 점점 깨끗해 지고 있다.


7 알바니아 티라나


역사는 인류의 족적이다. 기록되었으니 당연히 과거사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일 뿐인가. 단지 과거의 일이기에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추억하는가. 그런데 왜 과거의 이야기가 오늘의 문제로 이어지고 미래까지 나아가는가.

그것은 역사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록인 역사는 과거의 시간에 있지 않는다. 항상 현재의 시간 속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통해 미래를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알바니아는 발칸반도에서 최빈국이다. 영토가 우리나라 면적의 1/3크기로 작은 까닭도 있겠지만 외세에 의한 고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에템베이 모스크는 공산당 체제가 몰락하기 직전인 1991년에 만여명의 이슬람교도가 집회를 연 곳이다. 1928년에 세워진 35미터의 시계탑은 수도를 밝히는 건축물로 인기가 높다. 시계탑의 그림자가 에템베이 모스크에 닿으면 광장 근처의 시장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알바니아인의 역사는 기원전 2500년경 고대 일리리안족 계통의 조상들이 반도의 서쪽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부터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3세기부터 10세기까지는 고트인, 불가리아인, 슬라브인, 노르만인들의 침입에 시달렸다. 남부는 비잔틴제국의 지배도 받았고, 14세기에는 세르비아 제국에 포함되었다. 그 후 500년간 오스만트루크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이렇게 이민족에 의한 통치와 분할이 지속되고 이 과정에서 종교가 분리되었다.

수백 년 간의 로마 지배 시대는 가톨릭을 믿었으나, 15세기 오스만트루크의 지배를 받으면서는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그리하여 알바니아의 지난한 역사를 말해주듯 지금도 북쪽은 가톨릭을 믿고 남쪽은 이슬람을 믿는다. 언어도 문제다. 발칸반도는 대부분 슬라브어를 사용하는데 알바니아는 자신들의 언어만을 고집한다. 알바니아어는 고대 조상인 일리리안족의 언어에서 기원했는데 발칸지역의 여타 국가에서는 알바니아어를 읽지 못한다. 언어체계가 다르기도 하지만 최빈국의 언어를 배울 필요도 없는 것이다.

 

   
▲ 스칸데르베그 광장에 세워진 동상. 스칸데르베그는 15세기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맞서 싸운 군주로 알바니아의 영웅이다.


알바니아의 경제는 도로에서 알 수 있다. 비포장도로가 많고 포장된 도로라 하더라도 좁고 불편하다. 차량들은 벤츠가 많은데 대부분이 노후가 심한 초창기의 벤츠다. 이는 알바니아가 밀무역이 성행하기 때문이다. 서유럽에서 차량을 도난당하면 알바니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니 밀무역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 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도로를 달리는 차량들 속에서도 번호판이 없는 자동차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난리 통도 아닌데 번호판 없이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기후도 열악하다. 아드리아 해를 접하고 있지만 강수량이 적어 식수가 많이 부족하다. 집집마다 지붕에 커다란 물통이 있는 이유도 귀한 빗물을 받아서 쓰기 위한 것이다.

알바니아가 발칸반도의 최빈국이 된 것은 통치자의 책임이 크다. 2차 대전이 끝나고 구축된 엔베르 호자의 1인 공산지배체제가 무려 41년간이나 지속되었고, 통치기간 내내 스탈린주의를 고집하며 억압과 폐쇄만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수도 티라나로 향하는 길목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벙커가 곳곳에서 눈에 띠는데 이는 모두 호자가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고 국민들을 선동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모두 75만개가 있다고 하니 1인 공산정권치하에서 강요된 국민의 고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호자의 사망과 함께 동유럽의 민주화 바람을 타고 알바니아도 1992년 야당인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개혁적인 경제정책을 표방한 민주당 정권은 한 달 이윤을 600%까지 주는 금융상품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투자를 받았다. 이에 국민의 1/3이 투자를 했다. 하지만 곧 정치자금으로 활용되며 국민을 속인 것이 발각되어 내란으로 치닫고 결국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조기총선을 실시, 다시 공산당인 사회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피라미드 금융사건은 억압과 폐쇄로 점철된 알바니아 통치체제의 취약함과 국가운영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알바니아는 2000년대 들어 나토 및 EU가입을 통한 서방사회로의 편입을 경주하고 있다. 하지만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사회 전체에 만연한 무기 및 마약 밀거래 등의 범죄와 부정부패가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알바니아의 후진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호자의 통치시대에 나타난 악습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 티라나로 들어가는 도로 역시 비좁다. 티라나는 1차 대전 이후부터 수도가 된 곳으로 그 전에는 한갓 농촌에 불과했다. 국가 영토의 중간에 위치하여 무역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커지기 시작하였는데 도시계획도 없이 무분별하게 지어진 건물과 그 사이로 난 도로는 향후 티라나 발전의 난제이기도 하다.
 

   
▲ '슈코더르'성곽의 모습.


티라나에서 가장 유명하고 역사 깊은 곳은 중심부에 위치한 스칸데르베그 광장이다. 스칸데르베그는 15세기에 오스만트루크 제국에 맞서 싸운 군주로 지금도 알바니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영웅이다. 광장 한 편에 그의 늠름한 동상이 있다. 그런데 그 곳은 과거 엔베르 호자의 동상이 있던 곳이다. 1인 독재시절의 악명을 떨쳐내고 새로운 시대의 영웅으로 바뀐 것이다. 그의 이름은 터키어로 '알렉산더 대왕의 아들'이란 의미다. 동상 옆에는 붉은 바탕에 검은 독수리 문양의 알바니아 국기가 휘날린다. 알바니아인들은 자신들을 '수키퍼리아' 즉, 독수리의 나라라고 부른다. 이는 스칸데르베그 가문의 문장을 사용한 것이다.

광장에는 세 개의 유서 깊은 건축물이 있다. 에템베이 모스크와 티라나 시계탑, 그리고 국립역사박물관이다. 에템베이 모스크는 공산당 체제가 몰락하기 직전인 1991년에 만 여명의 이슬람교도가 집회를 연 곳이다. 1928년에 세워진 35미터의 시계탑은 수도를 밝히는 건축물로 인기가 높다. 시계탑의 그림자가 에템베이 모스크에 닿으면 광장 근처의 시장은 문을 닫았다고 한다. 국립역사박물관은 석기 시대부터 시작하여 일리리아, 로마 제국, 오스만트루크 제국, 공산당 시기를 거치는 알바니아 역사가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박물관 입장료는 알바니아 화폐만 받는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박물관 입장이 이처럼 어렵다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공산시절의 거대하고 쓸모없는 건축물일 뿐이다. 알바니아의 민주화는 외국인의 박물관 입장이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민주화 성지 '슈코더르'

'호국·저항' 도시 … 구국의 거점
기원전 4세기 왕국 수도 … '난공불락' 로자파성 위용

슈코더르는 알바니아 호국과 민주화의 근원 도시다. 이곳은 기원전 4세기 고대 알바니아인의 조상인 일리리아 족이 건설한 왕국의 수도였다.

왕국 시절에 건설된 로자파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중세 시절에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지금도 해발 150m의 언덕에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15세기 터키 군의 공격에도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곳이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알바니아 해방운동을 이끈 프리즈엔 연합의 거점이 된 곳으로 무장한 시민들로 구성된 민병대가 구국의 선봉에 섰던 곳이기도 하다.

1990년대 초 알바니아 민주화 운동이 시발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로자파성은 원래 슈코더르성이었다. 일리리아 왕국 시절 삼형제가 성을 완성했는데 성벽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결국 막내의 아내 로자파가 제물이 되었는데, 오른쪽 눈과 가슴, 손과 발은 성 밖으로 내밀어서 아이를 쓰다듬고 젖을 먹일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로자파성이 되었다. 이후로 성 주변의 스쿠타리호가 우윳빛이 됐고 지금도 알바니아 여인들은 로자파의 모성을 기리며 호수에 젖가슴을 적신다.

▲ 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