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전파의 중요 통로·외적 침입로 … 양면성 공존
한강, 내륙수로 국토 대동맥 구실'물자운반 중심'
비옥한 삶의 터전'임진강'군사적 요충지 역할도
   
▲ 여주 신륵사의 강월헌과 여강. 나옹선사의 당호를 딴 6각형의 정자와 나옹선사의 화장터에 건립된 4층 석탑 사이로 아름다운 강, 여강이 소리없이 흐르고 있다.


2 600년의 역사 '문화원형'을 찾아서(인문·자연·역사)
3-2. 사통팔달 왕도의 길

● 둘이 하나되는 경기도의 강
경기도의 강에는 역사가 흐른다.

"강은 2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우선, 하나는 국가가 번성할 때는 강을 통해 물산과 문화가 들어왔다. 또 다른 하나는 국가의 힘이 약화됐을 때 강을 타고 외적이 침입했다"고 윤여빈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실 연구원은 말했다.

이어 윤 연구원은 절두산 성지와 다산 정약용, 성호 이익 등에서 보듯이 종교나 실학도 강을 타고 들어오는 등 강은 문화전파의 중요한 통로였다고 했다.

경기도에는 한강과 임진강, 안성·진위천 등 3개의 큰 강이 흐른다. 이들 강줄기는 강상수로(江上水路)였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수로는 육로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이들 물줄기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한강은 강원도 태백산맥에서 발원, 충청북도와 경기도, 서울, 그리고 다시 경기도를 거치면서 514.8㎞의 대장정을 마치고 서해로 유입된다. 철조망을 넘나들며 경기북부를 아우른 또 다른 강, 임진강은 한탄강·영평천, 문산천을 합류하고 하류에서 한강하고 만나서 서해로 흘러든다.

이어 안성·진위천은 안성 고삼면·보개면 일대에서 발원해 평택시를 지나 아산만을 만난다.

경기도가 2008년 조사한 '경기도 물길이야기'에 따르면 139개의 나루터와 포구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나루터와 포구는 옛날부터 육상과 해상을 연결하는 기능을 했다.

"쌀과 소금이 흔바위나루로 들어와서 마차를 이용해 장호원으로 나갔다"는 여주 흔암나루, 원주에서 장호원으로 이동하는 소가 30여 마리 이상 무리를 지어 묵을 정도로 큰 창남나루 등 이들 나루터는 학생들의 통학로였으며, 주민들의 강원도와 충청도 장터까지 이동하는 교통로였다. 뱃삯은 1년에 보리 2말과 벼 2말을, 외지인은 200원~300원을 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북한강의 문호리 나루, 임진강의 덕진나루 등은 전국에서 사람이 모이고 물산이 유통되는 등 상권이 형성된 거점이었다. 퇴계 이황이 상경할 적에는 남한강 물길을 따라 두물머리의 양평포구에 도착, 이곳에서 관보를 보고 서울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이후 도시화와 대체 교통수단의 발달로 600년 넘게 이어오던 이들 포구의 나룻배 물길도 2천년대 들어서면서 모두 끊겼다.

이처럼 경기도 강은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고(泰山不辭土壤), 강과 바다는 작은 물줄기라도 가리지 않는다(河海不擇細流)'<사마천(史馬遷)의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는 말처럼 크건 작건, 같건 다르건 수 많은 지천을 받아들여 큰 강을 이룬다.
 

   
▲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동국여도(東國輿圖)>는 조선19세기 후반에 그린 그림으로 남쪽으로 경강(京江, 한강)과 북쪽으로 임진강에 이르는 지역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 물자가 모이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한강
'대수(帶水), 아리수(阿利水), 한수(寒水) 경강(京江), 한가람, 서울강(Seoul River)' 한강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한강은 조선초 수도가 한성(漢城)으로 옮겨지면서 내륙수로로 국토의 대동맥 구실을 했다. 오늘날에는 내륙수로의 기능은 사라지고 수도권의 수자원(水資源)과 관광·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북한의 강원도 금강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시 금대봉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양평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소리없이 하나로 몸을 섞어 새로운 강, '한강'의 본류를 이룬다. 이어 북서쪽으로 계속 흐르면서 왕숙천·탄천·중량천·안양천·굴포천 등의 작은 지류를 합치며, 하구에서 다시 임진강과 만나서 서해로 흘러간다.

한강은 선사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삼국시대에는 한강을 놓고 빼앗고 빼앗기는 한판 승부를 벌인다. 조선시대 한강은 물줄기를 통해 전국의 물자를 모았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패 역할을 했다.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에 경기지역에서 거주지로 각광받은 곳이 바로 한강변이다. 한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을 포함한 동서축의 긴 강상수로를 따라 서울과의 접근성은 물론 강원도와 충청도까지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초 북한강 유역 내륙지방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소금을 저렴하게 보급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한강유역의 내륙수로는 세곡과 지대수송과 관련된 선운업(船運業)의 발달에 의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특히 1608년 공물납부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실시한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계기로 일반 전세(田稅)뿐만 아니라 대동미도 운반됐기 때문에 강, 특히 한강을 통한 물자의 이동은 급격하게 늘어났다."<양보경 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한강을 끼고 경기와 충청일대의 중요한 뱃길을 장악해 쌀·소금·어물·재목·땔감 등의 물품을 최대 소비시장인 한양에 공급하면서 이익을 남겼던 경강상인은 상업활동에도 뛰어들면서 조선의 양반 사회에 새로운 계층으로 등장했다.

18세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백애촌(百涯村)으로 불리던 여주의 이포(梨浦)는 선상활동을 통해 얻는 소득이 농사를 짓는 것보다 월등히 많았다"고 조선 후기의 한강과 임진강 수로를 이용한 상업활동의 융성함을 이야기했다.

남한강 물길 중 여주를 휘감아 도는 40여㎞ 구간을 '여강(驪江)'이라고 부른다. 여강의 암반위에는 신륵사에서 입적한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 (懶翁禪師, 1320~1376)의 당호(堂號)를 딴 6각형 정자 강월헌(江月軒)이 말없이 굽이쳐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있다.

기자는 지난 21일 옛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고 삶을 이야기했던 누정문화를 꽃피운 강월헌에 올랐다. 정자에서 바라본 여강은 4대강 사업으로 옛 강변의 금모래 은모래 백사장의 정취를 느낄 수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를 화두로 삼았던 600년 전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聊無愛而無憎兮)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라는 시구절을 떠올렸다.
 

   
▲ 양평 두물머리 물래길


● 철조망 밑으로 흐르는 임진강
한반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임진강은 분단의 아픔을 눈이 시리도록 파란 강물에 삭이며, 남과 북의 경계를 넘나들며 철조망 아래로 흐른다.

함경남도에서 시작된 총 길이 254㎞의 임진강 유역은 연천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사용한 구석기 시대,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삶의 터전이요, 군사적 요충지였다.

임진강은 4세기 중엽 백제가 임진강 유역의 마한소국을 흡수한 후 영토를 확장해 고구려 평양까지 진출하면서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된다. 이어 고구려 장수왕이 이곳을 차지하고 난 뒤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120여 년 동안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하천이었다. 매초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가 8세기 중엽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는 등 역사적인 격전지였다.

임진강변에는 고려조의 윤관, 조선조의 황희와 이이를 비롯해 공릉(恭陵)과 영릉(永陵), 장릉(長陵) 등 왕후(王后)들이 잠들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 사신이 왕래하는 교통로이자 조선군의 군사 도로였다. 황희 정승은 반구정에서 율곡 이이 선생은 화석정에서 나라를 걱정하며 수려한 임진강의 절경을 읊조리는 등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누정(樓亭)문화를 꽃피었다.

6·25 때는 영국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혈전을 치러 수도 서울이 재점령되는 것을 막아낸 적성전투의 현장이었다. 곳곳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다.

휴전선과 비무장지대, 판문점, 임진각 등 분단의 상징이며, 통일의 상징인 강.

오늘도 임진강은 남과 북을 가로질러 흐른다. 그리고 말한다. '나처럼 소통할 것을.'
<경기도 물길이야기(경기도), 임진강(경기도박물관), 경기도3대하천유역 종합학술조사(경기도박물관) 등 참조>

/글 이동화·사진 김철빈기자 itimes21@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