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상·외교관·학자 … 적응력 뛰어난 인재 대거 배출
정조·황희·신사임당 등'인물 20명'생애·업적 눈길
   
▲ 조선왕조 명재상 황희가 만년에 인생을 관조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던 파주 반구정의 자태.


Ⅱ. 600년의 역사 '문화원형'을 찾아서
1 인문, 2 자연, 3 역사
1 큰 인물을 낳다(경기역사인물 20인)

600년 역사의 경기도는 명재상과 명외교관, 대학자 등 큰 인물이 많다. 그만큼 경기도 사람은 적응력이 뛰어나고 현실적이라고 한다. 개혁 군주 정조대왕과 개혁 정치인 정도전·조광조·김육, 대학자 이이·이익, 명재상 황희·이원익·채제공, 명외교관 서희, 나라를 구한 윤관·최영, 여성인물 명성황후·허난설헌·나혜석·최용신, 천재화가 신사임당, 실학의 완성자 정약용, 관포지교 이덕형과 이항복, 자존심의 상징 최익현과 이항로, 사제지간 천재화가 김홍도와 강세황, 현대사 주역 여운형·안재홍·신익희·조소앙·유길준, 효자 최루백과 최사립 등이 그들이다. 또 이규보·이정구·박세당·성혼·조현·최항·김상헌 등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새로운 정치와 사상을 펼치며 때로는 라이벌로 때로는 동료로 국가를 경영했다. 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이들 가운데 '경기 역사인물 20명'을 선정해 간략한 그들의 삶과 꿈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 신사임당영정

● 여성 예술가·현모양처 신사임당
"7살 때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고 배운 그의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뻔하기도 했다."<박용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시와 그림에 능한 천재화가이자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다. 그는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파주 율곡리가 시가이고 파주에 묻혀 있다.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상징인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다.

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사임당은 현모양처 이전에 화가로서 효녀로서도 훌륭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전통시대에 남성 지식인들의 눈으로 바라 본 것이었다"며 화가로서 추구했던 그의 삶이 재조명돼야 한다고 했다.

 

   
▲ 조광조영정

● 개혁 정치가 정도전, 조광조
"정도전은 '맹자'를 통해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며, 민심은 천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혁명의 정당성을 발견하게 된다."<김명우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실>

조선왕조를 설계하고 국정운영의 기틀을 다진 건국 일등공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봉화정씨 동족마을인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산등성이에 잠들어 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한 왕조교체를 위해서 군사력이 필요했던 그는 함흥에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고 조선개국의 공신이 된다. 요동 정벌을 계획한 그는 사병혁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됐다.

두 사람의 갈등 원인에 대해 이근호 국민대 교수는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했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의 정치개혁을 주도했지만 기성세력의 반발로 실패한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용인시 수지 상현동에 그의 묘소와 심곡서원(深谷書院)이 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면서 급진 개혁을 단행했다.

향약보급운동과 현량과 실시, 위훈삭제운동 등을 추진하지만 훈구세력의 반격과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走肖'는 '趙'자의 파획으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죽음을 당한다.

대학자 이이(李珥)는 그의 정치개혁이 실패한 이유를 학문이 숙성되지 않았다는 점,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점,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었다.

 

   
▲ 채제공영정

● 명재상 황희, 이원익, 채제공
조선왕조의 청백리 명재상 황희(黃喜, 1363~1452), 그는 파주에 그가 지었다는 정자 반구정(伴鷗亭)과 무덤이 있다.

그는 고려 말 과거에 급제했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杜門洞,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에 은거하다가 이성계의 간곡한 청으로 성균관학관으로 등용된 이후 경기도 도사(都事)와 판한성부사(오늘의 서울특별시장)를 지냈다.

1431년 69세에 영의정에 올라 87세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 동안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농사개량과 예법의 개정, 천첩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세종을 보필해 다방면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그가 만년에 유유자적 인생을 관조한 반구정(伴鷗亭)은 '갈매기를 벗 삼은 정자'를 뜻한다.

"이원익은 성품이 충량(忠亮)하고 적심(赤心)으로 국가를 위해 봉공(奉公)하는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사적인 것을 영위하지 않았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이원익(李元翼, 1547~1634)은 조선 중기 난세의 재상으로 '오리대감'으로 불렸다. 광명시 소하동에 많은 유적과 묘소 및 신도비, 오리영우를 비롯해 관감당 등이 남아 있다.
그는 영의정을 5차례나 지냈지만 2칸짜리 오두막 초가에서 산 청백리였다. 임진왜란 때 국난 극복에 힘을 모은 그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책으로 김육(金堉)이 건의한 대동법을 경기도지방에서 실시했다.

"시전상인의 독점행위를 철폐하는 신해통공을 실시, 조선 후기 상업사에 큰 변혁을 가져왔으며, 1794~1796년까지 수원 화성을 쌓은 최고 책임자인 총리대신으로 2년9개월 만에 화성을 완공했다."<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정조시대의 명재상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남인계열로 정조의 개혁정책을 실현하는데 앞장섰다. 정조 재위 24년 중 23년 동안 정조를 보좌했으며,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5번지에 묻혀있다.

그의 경제사상과 정책의 핵심은 '신해통공(辛亥通共, 1791년 육의전 이외의 시전(市廛)에 대한 전매 특권을 폐지하고 사상인(私商人)의 자유로운 매매를 인정한 상업정책)'과 '경제 신도시 화성 건설'이었다.

/이동화기자 itimes21@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