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주먹도끼'부터 IT산업 아우르는 진화의 진원지
산·강·해안 갖춘'풍요의 상징'…'경중미인'별칭도 붙어
   
▲ 연천군 전곡리 선사유적지에 있는 선사 인류가 주먹도끼를 들고 있는 모형


 

   
▲ 주먹도끼

(Ⅰ)한반도의 중심 '경기의 뿌리'-1.경기도, 경기도 사람

2014년이면 '경기도(京畿道)'가 행정구역으로 정립된 지 600년이 되고, 2018년이면 '경기(京畿)'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지 천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인천일보는 '경기도 600년'을 맞아 경기도의 정체성과 문화원형을 재발견하기 위해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수요일 '경기도 600년, 천년을 내다본다' 기획물을 연재한다.


● 끝없는 변신과 진화의 진원지
"경기도는 팔도의 사람·정보·문화가 소통하는 이른바 회통처(會通處)다. 모든 길은 경기도로 통하고, 그 길은 치도(治道)며, 왕도(王道)였다. 분열된 문화를 하나로 모으고, 앞선 문물을 세계로 전파하는 사통팔달의 열린공간이었다."(윤여빈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실 연구원)

약 35만년 전, 경기도 땅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에 정착한 호모사피엔스는 구석기 시대의 맥가이버 칼인 '전곡리안(Chongoknian)형 주먹도끼'를 만들었다. 전곡리 유적의 발견은 세계 고고학계의 학설을 뒤집은 사건이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그 자리에 세계 IT산업을 선도하는 수원 삼성전자와 파주 LG전자, 화성·광명·평택의 기아·쌍용자동차 등 첨단기업의 생산공장과 연구소가 들어섰다.
 

   
▲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 있는 6·25전쟁 당시 폭격 맞은 녹슨 기관차를 관광객들이 관람하고 있다.


이처럼 경기도 지역은 아날로그 시대의 첨단도구에서부터 디지털 시대의 첨단기술까지 그 끝없는 변신과 진화의 진원지였다.

그러기에 일찍이 농경문명을 일구었고, 삼국의 패권다툼 거점이었고, 국가를 경영하는 문벌귀족과 권문세족, 신흥사대부의 근거지였다. 근대 이전에는 실학과 효, 경기문학, 기호학 등 시대정신의 표상인 정신문화가 탄생했다.

경기판소리와 경기소리, 웃다리 풍물, 경기도당굿, 양주별산대 등의 예술문화가 꽃핀 곳이다.
경희대학교 김준혁 교수는 "모든 것이 모이고 소통한 만큼 문화의 최고봉을 이루고 대안을 내놓았다"고 경기도의 특징을 설명했다.

왜 이곳에 사람이 모이고 문화가 꽃피고 첨단산업이 융성하는 것일까? 무엇이 팔도 사람을 하나로 묶어냈을까?
 

   
▲경기 고지도 (여지총도)


● 기전천리의 경중미인
'경중미인(鏡中美人)', 흔히 경기도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거울 속에 있는 미인이라는 말이다. 심성이 단아하고 경우가 바르며 얌전하다는 뜻일 것이다.

조선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은 '경기의 산하'에서 '비옥하고 풍요로운 기전천리(沃饒畿甸天理)'라고 경기지역의 풍광을 노래했다. 그렇다. 큰 강과 하천, 해안, 산악지대를 두루 갖춰 산수가 수려하고 4계절의 기후 변화도 뚜렷하다. 경기북부의 한대성 기후와 경기남부의 열대성 기후는 쌀쌀맞은 처자같은 적절한 긴장감을 주는 날씨다.
 

   
▲ 파주 제3땅굴 조형물


13차례나 화성을 방문하고 현륭원을 참배했던 정조대왕이 어버이와 헤어짐이 서운해 수원의 지지대 고개에서 한없이 머뭇거렸던(遲遲臺上又遲遲臺) 효심이 깃든 곳이다. 이같은 조선시대 국왕의 효심과 함께 회자되고 있는 고려시대 민간의 효행 이야기도 있다.

"네가 나의 아버지를 해치었으니 내 너를 잡아 먹으리라"며 15살 어린 아들이 호랑이의 배를 가르고 아버지의 뼈를 가지고 돌아왔다는 화성 사람 효자 최루백의 효행은 '삼강행실도'와 중국의 '해동금석원'에도 실려 있을 정도다.

윤한택 전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실장은 "경기인은 동서남북을 통한 파동과 입자, 공간과 시간의 소통처인 중위의 자리에 있어서 유가의 중용과 불가의 중도를 무위자연의 형태로 시현하는 노자적 성향에 가장 근사하게 정향된 것으로 보인다"고 경기도 사람의 개성을 설명했다.

그는 또 "경기 웃다리 풍물은 섬세한 장구와 웅장한 북을 조율하는 높고 맑은 꽹과리가 앞서며, 진도아리랑의 걸죽함과 밀양아리랑의 검박함에 비해 경기소리는 고상함을 앞세운다. 또한 지리산 권역의 동편제·서편제에 비해 한남정맥의 중고제는 신비의 청아한 글 읽는 고졸함을 그 특성으로 한다"고 경기도 사람의 멋과 풍류를 이야기했다.

이처럼 경기도 사람은 넉넉한 자연환경이 내주는대로 크고 작은 독특한 생활터전에서 경우 바르고 실속 있게 살고 있다.
 

   
▲ 경기도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현장


● 왜 600년인가

 

   
▲ 수원화성 야경

2014년은 '경기도'가 이 땅에 자리잡은 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60간지(干支)로 환산하면 10번째 순환을 맞이한다. 오늘날 경기도라 부르는 지역은 조선왕조 초기 지방행정의 큰 틀을 8도제(八道制)로 구분했을 때 정해진 것으로 이제 600년이라는 연륜을 지니게 됐다. 옛기록에 의하면 경기도는 원래 고대 진국의 땅이었으나 삼한으로 분리되면서 마한에 속했다.

백제가 기원전 18년 한강유역에 도읍을 세우고 등장하면서 경기도는 역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하고, 고려가 1018년(현종9년) 수도 개경과 그 인근 지역을 묶어 '경기(京畿)'라는 이름의 행정구역을 처음 사용한다. 경기제(京畿制)가 중앙에서 분리되어 지방제도로 된 것은 고려 후기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가 성립되면서부터다. 그러나 이 당시의 경기는 지금의 경기도 지역에 비하면 다소 북서쪽에 위치하고, 양광도 또는 충청도 북부지역이 현재 경기도 땅이었다.

이어 1414년(태종14) 1월 관제를 고치면서 경기를 경기좌도와 경기우도를 합해 '경기도'라고 했다. '경기(京畿)'란 '서울(京)'과 '서울 주변지역(畿)'을 말한다. 원래 '경(京)'은 천자의 도읍을, '기(畿)'는 천자가 직접 관할하던 도성 주위 1,000리(里)의 땅을 의미했다. 이러한 당나라 '경기제(京畿制)'가 고려 때 도입되면서 '근본의 땅(根本之地)', '사방의 근본(四方之本)' 등으로 인식됐다. 고려시대 처음 등장하고, 조선시대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경기도는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 경기도는 27개 시(市)와 4개 군(郡)을 거느리고 1천200만 명이 거주하는 최대 광역자치단체가 됐다. /이지훈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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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화기자 itimes21@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