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안동 여고생 폭행살인 사건


 

   
▲ 인천 남구 주안동 여고생을 성폭행하고 숨지게 한 박모(당시 29) 씨가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인천 남부경찰서(옛 동부경찰서)

● 유일한 단서는 범인의 정액'
흔적 없애려 현장에 물 뿌려
경찰, 주변인 DNA 분석 수사


● 사건 한달 뒤 접수된 변태신고
주변 5~7개 블록서 잇단 피해
발견 정액, 단서와 일치
신고 없는 유일한 블록서 범인 검거

▲ 방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여고생

"딸이 숨을 쉬지 않아요."

지난 2005년 9월10일 이른 아침부터 한 아주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인천동부경찰서(현 남부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강력팀 형사들이 도착한 현장은 남구 주안동 한 가정집의 여고생 방. 방안에서 숨진 김선미(가명·당시 17) 양은 반듯하게 누운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전날 밤 가족들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방안에 들어간 김양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안방과 거실에서 각각 잠을 자던 부모와 남동생들은 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고 한다. 김양의 목엔 누군가가 목을 조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형사들은 범인이 창문 쪽을 통해 침입한 것으로 추정했다. 방충망이 'ㄴ'자로 뜯겨 있었기 때문이다. 김양이 더운 날씨에 창문을 열어 놓은 게 화근이었다.
 

   
 


의외로 방안은 어지럽혀져 있지 않았고 물건도 그대로 있었다. 강·절도처럼 금품을 노린 범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형사들은 방 곳곳이 물기로 젖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김양의 잠옷과 이불도 포함해서 말이다.범인이 자신의 범죄 흔적을 의도적으로 지우기 위해 물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대목이었다.
하지만 범인은 흔적을 완벽히 지우는데 실패했다. 김양의 특정부위에 범인의 '정액'과 책상 위에 '지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하늘이 범인을 도왔던 것일까. 당시엔 경찰청 과학수사센터의 지문자동 검색시스템(AFIS) 성능이 좋지 않아 해당 지문에 대한 신원 확인이 이뤄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모든 성인들의 지문이 등록돼 있는 AFIS는 범죄 현장에 용의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문과 등록된 지문을 대조, 용의자를 밝혀주는 경찰 수사시스템이다.

결국 정액 하나만으로 범인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돼 버린 것.

동부서는 즉시 수사전담반을 꾸려 김양의 주변인들과 사건 발생 지역에 사는 동종 전과자들을 대상으로 탐문 수사에 나섰다. 2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구강상피세포를 채취해 범인이 남긴 정액 유전자(DNA)와 대조하는 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용의자의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고 수사는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 인천경찰청 과학수사계 증거분석실에서 형사들이 범죄 사건과 관련해 회의를 하고 있다. 이곳에선 다양한 증거 분석이 이뤄져 인천경찰의 과학수사가 결집된 곳이기도 하다.


▲ 훔쳐보기를 즐기던 한 남성

"변태가 나타났어요."

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난 10월19일 새벽 한 여성이 전화로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여성의 집은 김양의 집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정확히 300m 떨어진 위치였다.

남성이 집 밖에서 창문을 통해 방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자신을 쳐다보며 자위행위를 했다는 게 피해여성의 진술이었다.

현장은 이미 남성이 사라진 뒤였지만 담장 위엔 변태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이 묻어 있었다.

형사들은 이 정액을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연구원)에 DNA 분석을 의뢰했다.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김양을 살해한 범인의 DNA와 훔쳐보기를 한 변태 남성의 DNA가 일치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범인이 관음증(훔쳐보기를 통해 쾌락을 느끼는 증상) 환자라는 게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더 많은 변태 신고가 접수되지 않았을까?" 형사들은 즉시 관할 지구대를 통해 변태 신고 접수 현황을 살폈다. 30여 건 정도가 접수돼 있었다.'성범죄자는 자신의 집에서 걸어서 5~15분 소요되는 장소에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과거 성범죄자들의 조언을 참고, 변태 신고가 접수된 장소들을 하나씩 확인해 봤다.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5~7개 블록엔 변태 신고가 접수됐는데 이 블록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있던 한 블록엔 단 한 건도 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것이다.

형사들은 이 블록에 범인이 거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변태의 뒤를 쫓았지만 금방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주민들의 진술에 대한 의문도 이제야 풀렸다.

형사들은 해당 블록에 거주하는 남성들을 상대로 구강상피세포를 채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20대 남성이 회사가 지방에 있어 바쁘다는 핑계로 경찰의 수사를 피했다. 지난 2006년 2월14일 명절을 맞아 가족과 함께 있던 남성은 형사들의 갑작스런 방문에 구강상피세포를 채취 당했다. 형사들의 예상대로 범인은 이 남성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도 일치했다.



▲ 관음증에서 강간살인 범죄로

박모(당시 29) 씨는 범행 5개월여 만에 경찰에 검거됐다.

박씨는 경찰 조사에서 김양의 방에 창문을 통해 침입, 김양을 성폭행했다고 밝혔다.

이후 김양이 일어나자 자신을 신고하려는 것으로 여겨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시인했다.

그는 범행 뒤 발자국과 지문을 없애기 위해 약 2㎞ 떨어진 자신의 집에서 1.8ℓ 페트병에 물을 담은 뒤 다시 범행 장소로 가 방안에 뿌리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박씨는 김양을 알지 못했으나 범행 장소를 찾던 중 김양 방이 구조상 침입하기 쉽다고 판단, 김양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했다.

박씨는 앞서 5개월 전인 4월3일 새벽에도 남구 한 가정집에 몰래 들어가 20대 여성을 성폭행하기도 했다.
박씨는 원래 단순한 관음증 환자였다.

집안에 있던 여성들을 집밖에서 훔쳐보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꼈고 어느 순간엔 훔쳐보기와 동시에 자위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좀더 높은 수위로 성 욕구를 해결하고 싶었다.

20대 여성을 강간하고 그 다음엔 여고생을 강간살인한 것이다. 관음증이 강력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김학봉 형사는 "박씨는 어렸을 때부터 남의 집을 엿보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며 "관음증이 더 큰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했다.

인천지법은 같은 해 7월 박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에 의해 무고한 여고생이 정조를 유린당하고 생명까지 잃게 되는 참혹한 결과가 발생했고 가족들도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면서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침해한 자는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는 원칙을 명확히 하고 인명경시 풍조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박범준기자 parkbj2@itimes.co.kr

과학수사 상식 - DNA 분석

경찰이 용의자에게서 채취한 구강상피세포(입 안을 얇고 매끄럽게 덮은 껍질)의 DNA를 범행 현장에서 나온 체모, 정액 등의 DNA와 일치하는지 확인, 피의자를 특정하는 과학수사 방법.
DNA 분석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 강호순은 지난 2006~2008년 경기도 서남부 일대에서 여성들을 잇달아 납치·살인한 흉악범이다. 국과수 연구원들은 강호순이 예전에 입었던 옷에서 핏자국을 찾아 낸 뒤 앞서 살해된 피해자의 유전자와 일치한다는 점을 입증했다.


 

   
 

■ 인터뷰 / 범죄사회학자 곽대경 교수

"관음증은 왜곡된 성의식서 비롯"



"박씨는 관음증이 강간살인 등 강력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케이스입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19일 "관음증 환자는 원래 박씨처럼 공격적이지 않다"며 "이들은 통상적으로 훔쳐보는 거 자체에 만족하거나 자위행위를 하는 선에서 끝낸다"고 설명했다.

곽 교수는 이어 "최근 관음증 환자들은 몰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며 "몰래 숨어서 여성들의 특정 부위를 카메라 또는 휴대전화로로 촬영하는 것인데 이 범죄는 훔쳐보기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곽 교수는 "박씨는 관음증 환자 중에서도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며 "단순히 보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극적이고 적극적인 범죄를 실행에 옮겼다. 박씨의 머리 속에 범죄 시나리오가 그려졌을 것이고 현장에서 의도대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어느 순간 훔쳐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박씨의 성적 욕망이 여고생을 강간하고 살인하는 잔인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는 "관음증 환자들은 야한 동영상과 만화 등을 통해 왜곡된 성의식을 쌓다 소위 변태가 되는 경우가 많다"며 "관음증은 성도착 증세의 한 종류이다"고 했다.

곽 교수는 관음증을 치료하기 위해선 "우선 이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성에 대한 가치관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며 "정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박범준기자 parkbj2@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