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12세기 유럽 상공·금융업 메카

 

   
▲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전경.'꽃의 성모마리아 성당'이란 뜻으로 르네상스의 중심 역할을 한 피렌체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예술의 도시를 대표하는 건축물답게 카스타뇨의 프레스코 벽화, 미켈란젤로의'피에타'상 등 유명 예술가들의 조각과 회화가 보존되어 있다. 특히 2001년 일본 영화'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이 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피렌체(이탈리아)=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3부> 실크로드의 종착역 이탈리아 1. 피렌체, 밀라노 - 인류문명의 원동력은 '인문학'이다

인류가 창조한 문명은 오랜 시공을 초월하며 발전하여 왔다.

자연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여 이제는 자연을 앞서고 있다.

인류사의 시작은 자연 속에서의 생존을 위한 다툼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로부터 안정을 찾음으로써 자연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저마다 사상과 문화가 태동했다.

그리고 인류의 지적 활동에 의해 새로운 지식이 축적되고 이는 신사상과 문화를 여는 지혜를 제공했다.

지식과 지혜의 축적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명을 이루어 인류를 진일보한 세계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인류문명의 발전을 견인한 것은 다름 아닌 '인문학'이다.

자연과학에 대립되는 인문학은 인간의 모든 가치탐구와 표현활동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즉, 인간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모든 영역을 말한다.

인문학을 중시하는 경향은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강했다.

오늘날 서구사상의 근원을 이때에 두고 있는 것도 바로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본격적인 인문학이 태동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필독으로 읽어야 하는 고전의 상당수도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것이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 봉건사회가 시작된다.

인문학은 사라지고 인간성은 말살된다.

중세봉건사회를 일컬어 야만시대, 암흑시대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시대였기 때문이다.

인간성의 존재감조차 의미 없는 시대의 연속은 자연스럽게 고대에로의 회귀를 염원한다.

샤를마뉴의 '로마제국'이나 오토대제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은 중세 봉건사회 내내 고대 로마제국의 문화에 대한 동경의 발로였다.

이러한 염원은 중세사회의 틀을 깨는 운동으로 변화하니,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의 오랜 역사가 축적된 곳일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이슬람, 비잔틴과의 접촉을 통해 서유럽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11세기부터는 상업의 부활과 십자군 운동의 참여로 도시가 활성화되었고, 12세기에는 중북부지역에 많은 자치도시가 생겨나 주변의 농촌지역을 지배하며 도시국가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발전과 함께 상업성이 가미된 독특한 시민문화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들 도시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부흥을 통한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이라는 새 문화 창출에 앞장선다. 그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곳이 피렌체였다.

피렌체가 도시로서 발전한 것은 기원전 2세기부터다.

이는 피렌체가 로마에서부터 뻗어오는 카시아 가도(街道)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12세기 무렵부터 모직공업이 발전하여 많은 직물상인이 조합을 만들어 번성하였고, 이와 함께 피렌체는 유럽 상공업과 금융업의 중심이 되었다.

피렌체는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13세기에 이르러 인근도시를 지배하며 인구 10만이 넘는 강대한 공화국이 된다.

그리하여 산업은 물론 문화면에서도 이탈리아의 중심이 된다.

15세기부터는 메디치가 가문 자신들의 권력체계를 확립시키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황금시대를 맞이한다.
 

   
▲ 밀라노대성당 옆에 있는 빅토리아 엠마누엘 2세 화랑, 이곳에는 세계적인 명품상점이 즐비하다.


밀라노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이자 북이탈리아 공업의 중심도시다.

374년에는 밀라노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聖)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의 대주교가 되면서 북부 이탈리아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밀라노는 근대 이탈리아의 각축장이었기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없었다.

밀라노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전통적인 섬유공업의 바탕 위에, 중화학공업이 발달함으로써 이탈리아 최대의 공업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시가지가 폐허가 되었다.

오늘날은 중앙역을 중심으로 고층건물이 늘어서서 오피스 상가를 이루고 밀라노의 시민들은 패션마니아라는 말처럼 세계적인 패션도시로 발전하였다.

인간 활동의 모든 것은 경제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탈리아가 중심이 된 르네상스도 이탈리아의 경제력이 쇠퇴하자 빛을 잃는다.

오랫동안 동서간의 무역을 독점한 이탈리아는 절대주의 국가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고, 영국이나 네덜란드와 같이 국가적으로 대응하는 경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또 에스파냐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신항로의 발견과 이를 통한 동양과의 직접무역은 이탈리아를 중심적 지위에서 비켜나게 했다.

21세기, 오늘의 이탈리아도 어렵고 힘든 경제의 파고를 넘고 있다.

고대 로마제국과 르네상스의 영광은 이제 또다시 기약할 수 없는가.

피렌체 들녘으로 저무는 석양이 상기된 얼굴과 목소리로 말한다.

"세계사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 이탈리아가 낳은 위대한 시인 단테의 생가.<신곡>을 지은 단테는 문예부흥의 선구자였다.


문예부흥 운동의 선도자 메디치 가문

메디치 가문은 15~16세기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았던 시민 가문이며 공화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또한, 적극적인 학문과 예술의 후원을 통하여 르네상스시대가 피렌체에서 꽃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메디치가는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공화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이었으나 은행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면서 유명해진다.

메디치 가문은 1400년부터이며 1748년까지 약 350년간 지속되었는데, 피렌체공화국에서 공직을 수행한 인물들도 배출되었지만 전통적으로는 상업을 통해 재력을 키운 평민가문이다.

1378년 가문의 한사람인 살베스토로는 시의회에서 평민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한 때부터 줄곧 메디치 가문은 대중의 입장을 지지하는 전통을 이어나갔으며 1400년 메디치 가문의 수장인 조반니 디 비치가 피렌체의 귀족들과 대립하여 평민의 입장을 옹호하자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메디치가는 유럽 전역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교황청과의 거래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재력을 기반으로 정계에도 진출하여 피렌체공화국의 수반이 되었다.

그리고 귀족에게 유리한 세금제도의 철폐와 평민들의 이익을 위한 제도의 혁신, 많은 재산의 공화국에의 기부 등으로 귀족과 평민 양쪽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문예부흥사업에도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부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피렌체가 문예부흥운동인 르네상스의 중심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힘은 민중들의 지지와 상업 자본이었다.

이를 통해 잡은 정권으로는 피렌체 공화국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들 가문은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고 장려하는데 막대한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하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들의 후원을 받으며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수 세기에 걸친 메디치 가문의 이러한 활약은 적장자 계열의 후손이 끊어지고 친척인 차자계열의 후손이 이어받으며 쇠퇴한다.

과중한 세금을 거둬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7대째 350년간 이어져 온 메디치 가문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탈리아=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