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나라 그리스 2 국제 정치의 중심지, 델피
   
▲ 고대 그리스 최고의 신탁장소인 델피신전의 모습. 지금은 돌기둥 몇개만이 남아 있지만 예전 이곳에는 지중해 각 도시에서 신탁을 받으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던 최고의 국제정치무대였다. /델피(그리스)=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신탁·올림픽 개최장소 … 지중해 전역서 사람 운집
1800년대 코린토스 운하 완공 후 교역 활발 번영


아테네에서 1시간 반 정도를 달리면 그리스 시대 최고 신탁의 장소인 델피에 도착할 수 있다.

브이자(V) 계곡의 끄트머리 산 중턱에 위치한 이곳은 아폴론 신이 자신의 신전을 짓기 위해 이곳의 여신의 아들을 죽이고 그 죄로 돌고래로 6년을 살아 얻은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돌핀, 돌고래에서 유래했다.

아폴론은 그리스 사람으로부터 가장 추앙받는 신이었다. 태양의 신이며 예언의 신, 남성의 신, 이성의 신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이 성행하게 됐다.

이곳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신탁의 장소였기에 아테네 등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물론 지중해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신이 되고 싶은 고대인들이 신을 인간세계로 끌어내리려는 열망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또 다른 역할은 바로 올림피아다. 2천500년 전에는 12m의 신상이 서 있었고 금과 상아로 제우스신의 능력을 찬양하며 체육행사인 올림픽을 주재했다.

 

   
▲ 델피박물관에 전시된 조형물

4년마다 도서지역과 이태리의 그리스인들이 모였고 멀리뛰기, 원반, 투창, 레슬링, 180m 달리기 등 5종의 경기를 치렀다.

그리스의 운동은 온힘을 쏟아 신에게 바치는 경기였다. 지금도 유적 맨 위쪽에는 거대한 야외 경기장이 잘 보존돼 있다.

신탁과 올림픽이 열린 이곳의 여정은 최소 수개월씩 걸린다. 당연히 많은 이들이 모여 들면서 지중해 최고의 정보교류의 장, 국제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전역에서 전쟁이나 중요한 정책시행을 앞두고 신탁을 받으러 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이곳의 자신감은 유적이 입구에 위치한 옴파로스 유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옴파로스는 아폴론신이 세상의 중심을 알기 위해 세상 동쪽과 서쪽 끝에서 독수리를 날렸는데 바로 이 곳 델피에서 만났다고 한다. 세상의 배꼽을 기념해 이 돌조각을 신전 입구에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에개해와 이오니스해를 연결하는 코린토스 운하

하지만 이 돌 조각은 후대에 가져다 놓은 것이고 진짜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델피 박물관에 대리석으로 만든 옴파로스가 있지만 이것 또한 로마시대에 만든 모조품이라고 현지 박물관 직원이 알려 준다.

옴파로스와 함께 보물창고 건물도 이곳의 자신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육체훈련을 중시 했던 고대인은 인간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해 마라톤 전쟁을 승리한 것을 기념해 보물창고를 지어 신에게 헌납했다.

도시마다 자신들이 정치적, 경제적 위상을 자랑하기 위해 보물창고를 지었는데 국제 정치의 허브였던 이곳에는 다양한 보물들이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선물한 낙소스의 스핑크스 상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당연히 환락의 문화도 함께 공존했다.

델피를 지배한 또 다른 신인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 포도나무의 신, 초목의 신, 바다의 신이다.

디오니소스에게 오면 술이든 종교든 마음이 녹아내린다. 아폴론이 델피를 떠나있던 3개월 동안 디오니소스가 이곳을 지배했으며 멸망을 재촉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그리스 최대의 교역도시 코린토스

모든 배가 코린토스로 가지는 않는다.

 

   
▲ 델피 신전 입구에 놓여 있는 옴파로스

아테네에서 2시간 남짓 달리면 고대 상업·물류 중심지인 코린토스 항구와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세계문화사에도 유명한 '코린트양식'의 발원지이자 신약성서의 '고린도서'를 기록한 무대이기도 하다. 특히 유적 뒤편의 시지프스산에는 바로 인간을 위해 신의 노여움을 사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간 시시포스(Sisyphos·시지프스) 신화가 깃들어 있다.

그리스 당시부터 이곳에서는 운하건설계획이 있었지만 1800년대에 와서야 이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곳이 바로 에게 해와 이오니아 해를 연결하는 코린토스 운하가 있는 장소이다.

지금은 폐허로 변한 코린토스지만 3천 년 전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였다.

지중해를 내려다보며 언덕위에 건설된 아폴론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이나 제우스 신전보다 앞선 건축물이다. 그 옆으로 아고라 광장과 로마식 열주로가 로마시대까지 영화를 누렸음을 증명하고 있다.

지중해를 넘어 멀리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등 아프리카·아시아 지역에서 오는 도자기와 청동물품, 향신료 등의 교역중심지로 커다란 번영을 누렸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지중해를 누비던 삼단의 노를 가진 배, 갤리선을 처음으로 만든 것도 코린토스인 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페르시아 전쟁패배로 주도권은 이웃 도시국가인 아테네로 넘어갔고, 로마제국의 전쟁에 패배하면서 이곳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케르사르(일명 시저)는 이곳의 지정학적 이점을 알고 도시를 건설하게 됐고 다시금 영화를 누리게 된다. 코린토스는 로마의 그리스 속주에서 가장 번성하는 도시였고 지금 우리가 코린토스 폐허에서 보는 것은 모두 이 시대의 유물들이다.

당시 그리스인들의 속담에 '모든 배가 코린토스로 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동서남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다는 반증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락과 퇴폐의 도시인 코린토스로 가고 싶은 옛 뱃사람들의 열망이 들어있기도 하다.

실제 코린토스 시지프스 산 정상에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사제만 수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다른 도시의 신전에 수백 명에 불과한 것에 비하면 많은 숫자다. 이들 사제들은 대부분 매춘을 겸했는데 그 만큼 타락의 모습이 도시 전체에 넘쳐 나고 있었다.

사도 바울로가 이곳에 올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도를 위해 이곳에서 1년 반을 지낸 그는 설교와 전도로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이 지역에 노예로 끌려와 세력을 키웠던 유대인들은 바울로의 설교와 전도 행위가 모세의 율법을 해친다며 코린토스의 총독 갈리오에게 사도 바울로를 고발했다. 당시 총독 갈리오가 바울로를 고발하기 위해 몰려온 유대인들에게 연설한 장소인 베마라는 구조물은 아직도 코린토스의 아고라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뒷날 그리스도 교도들은 이 사건을 기리기 위해 베마 위에 교회를 세웠다.

로마시대 다시금 번영을 누렸지만 기원후 500년대 두 차례 대지진은 도시의 모든 것을 파괴했고, 11세기 들어서야 겨우 도시가 재건될 수 있었다.

프랑크 족과 베네치아인들, 그리고 끝으로 오스만 터키의 군사 기지로 사용됐으며 코린토스 뒤쪽 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투박한 성채는 바로 베네치아 시대의 유물이다.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도 해 '코린토스의 족쇄', '코린토스의 이빨'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820년대에 있었던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터키군은 바다를 통해 후퇴했다. 그 후, 이곳 바닷가에 새로운 코린토스가 세워졌다.



터키=인천일보-인하대 실크로드탐사취재팀

/남창섭기자 csnam@itimes.co.kr

/허우범 인하대 홍보팀장 appolo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