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피부라 해도 미국의 사람들과는 참 많이 다른 모습의 아프리카 사람들. 참 선한 표정들이지요. 금방 권총이라도 꺼내 들 듯한 얼굴이 아닌 그들에겐 부드럽고 깊은 우수 어린 눈동자가 있어요. 갑자기 자이레출신 친구가 생각납니다. 세상에 제일가는 도둑놈 위정자를 쫓아내고서 이제는 콩고라고 이름을 바꿨지요. 2011 김충순, 210㎜x290㎜ 켄트지 위에 연필, 수채물감.


그날 밤, 박부장의 체온이 아직도 남아 있는 호텔 침대 위에서 초이는 디디에라는 프랑스인과 섹스를 했다. 흑인과는 처음이었다. 흑인 남자들의 몸에서는 모두 나쁜 냄새가 나는 줄 알았는데, 디디에에게서는 바나나 향이 났다. 그는 정갈하고 깔끔했으며 길게 땋은 레게머리도 지저분하지 않았다. 초이는 프랑스어를 전혀 할 줄 몰랐으며 디디에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적이 같은 두 남녀가 섹스를 하는 데 있어서,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언어가 막힘으로써 육체는 더욱 민감해질 수 있었고, 초이는 박부장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커다란 쾌감을 디디에로부터 받았다.

디디에가 초이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그녀의 민낯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호텔 바에는 비즈니스걸들이 많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칵테일 한 잔 들고 몇 시간을 버티며 남자가 작업 걸 때까지 기다리거나, 혼자 온 남자들에게 접근해서 유혹하는 비즈니스걸이라면 당연히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박부장이 12시가 되기 전에 떠난 후 혼자 있던 초이는 민낯으로 내려왔었고, 그 싱싱함이 디디에를 사로잡았다.

디디에도 그 호텔에 묵고 있었다. 디디에는 자기 방으로 가자고 했지만 초이는 디디에를 자기 방으로 데려왔다. 처음에는 디디에를 따라 그의 방으로 올라갔지만 디디에의 방은 산 쪽 사이드였고, 초이의 방은 그보다 비싼 강변 쪽 사이드였다. 그래서 전망도 훨씬 좋았다. 그러나 사실 전망 때문에 디디에의 방에 갔다가 다시 초이의 방으로 옮긴 것은 아니었다. 초이는 디디에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박부장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디디에는 진짜 남자였다. 그의 몸은 옷을 입고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샤워를 하고 나오는 몸을 보고 초이는 자기도 모르게 허걱 소리가 나왔다. 그의 몸은 근육으로 단단했고 배에는 가끔 TV에서나 봤던 초콜릿 복근이 있었다. 어린애 팔뚝만하게 발기한 그의 성기는 크고 단단했으며 쉽게 죽을 줄을 몰랐다. 그는 체위를 다양하게 바꿔가며 지칠 줄 모르고 피스톤 운동을 했으며 두 손과 혀, 입술을 이용해서 피스톤 운동을 하는 동안에도 초이의 온몸 구석구석을 애무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야경을 보기 위해 커튼을 치지 않았는데, 다음날 아침 해가 창문을 통해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그들은 섹스를 했다. 디디에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지고 있었고, 초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는 디디에가 다시 발기된 성기를 세우고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초이의 몸에 소름이 들 정도로 무섭기까지 했다. 디이에가 싫어서가 아니라, 섹스가 싫어서가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숨 막히는 시간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본능적으로 초이의 몸이 경직됐다.

디디에는 그렇게 아침까지 섹스를 하다가 조찬 약속이 있다며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잠 한숨 자지 않고 나갔다. 디디에가 나간 후 그대로 초이는 곯아떨어졌다. 까무러쳤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정도로 그녀는 쓰려졌다. 그렇게 깊은 잠을 잔 것은 처음이었다. 초이는 12시 30분쯤 호텔 프런트의 전화를 받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디에는 가기 전, 초이가 그날 하루만 방을 잡았다는 것을 알고, 초이에게 자신의 방 열쇠를 프런트에 맡겨 놓을 테니까 자신의 방에 있으라고 했다.

초이는 일주일 동안 디디에와 함께 있었다. 그는 국제무기상이었다. 외모만 가지고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프랑스제 무기를 한국에 팔기 위해 찾아온 전문 브로커였다. 국가 간의 거래이기는 했지만 무기를 제조하는 회사들은 민간회사였고 디디에는 그런 무기들을 중동이나 아랍, 남미 등에 파는 일을 했다. 낮에 그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닌 지 정확히 몰랐지만 밤에는 쉬지 않고 초이를 만나 즐겁게 해주었다.

초이와 같이 있는 일주일 동안, 한국군 장교들과 회식이 있다며 새벽에 들어온 날을 제외하고, 디디에는 항상 직장에서 칼퇴근하는 샐러리맨들처럼 6시가 되기 전에 호텔로 돌아왔다. 초이는 그와 함께 호텔 식당이나 이태원 등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바에서 술을 한잔했으며 다시 호텔로 돌아와 새벽까지 그와 섹스를 했다. 정말 행복한 날들이었다. 이런 남자와 평생을 이렇게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박부장에게서 문자가 오고 전화가 온 적이 있었지만 그녀는 답장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디디에와 있는 동안 초이는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설정해 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뜨겁던 디디에도 출장기간이 끝나고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자 초이와의 관계를 칼로 자른 듯 끝냈다. 디디에는 결혼은 안 했지만 파리에 동거하는 여자가 있었다. 초이를 앞에 두고도 그는 프랑스 여자와 다정하게 통화를 했다. 프랑스어를 전혀 못했지만 디디에가 전화받는 태도만 봐도 초이는 그 전화가 업무용인지, 프랑스 여자에게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초이에게는 그렇게 다정하게 잘해주던 디디에였지만 끝날 때는 냉혹할 정도로 칼같이 관계를 정리했다. 디디에에게 초이는 서울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여자에 불과했다. 초이 역시 처음부터 디디에와 사랑에 빠져 섹스를 한 것은 아니었고 박부장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었지만, 초이는 어느 순간 이 남자와 같이 산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디디에는 다정다감했다.

디디에가 떠난 후 초이는 생각에 잠겼다. 모든 남자들은 다 똑같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자신의 육체뿐이었다. 박부장도 디디에도, 초이와 섹스를 할 때는 온 세상을 다 줄 것처럼 그녀의 말에 귀 기울여 주었지만 섹스가 끝나면 각자 그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초이는 철저하게 버려졌고 이 세상에 혼자였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초이 역시 그렇게 살면 되었다. 자신의 일을 하다가 필요에 의해서 남자를 만나고 그들과의 섹스를 통해 육체적 쾌락을 느낀 후 그를 떠나면 된다. 다시 자신의 일과 직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온다. 초이는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살면 박부장만 바라볼 필요도 없고 그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상처받을 이유도 없었다, 박부장이 필요에 의해 자신을 만나는 것처럼 초이 역시 필요에 의해 박부장을 만나면 된다. 이론적으로는 완벽했다.

초이는 디디에가 떠난 후 삶을 바꾸기로 했다. 더이상 박부장에게 끌려다니는 삶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기로 했다. 유부남은 절대 만나지 않았고, 아무리 스펙이 좋은 남자라고 해도 3번을 만나 섹스를 하는 동안 자신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면 칼같이 관계를 정리했다. 3번이라고 숫자를 정한 것은, 대부분 처음 섹스할 때는 술을 마신 뒤가 많았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했다. 그다음 두 번 중 한 번은 제대로 그녀를 만족시켜줘야만 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남자들이 초이가 정한 커트라인을 넘지 못했다.

박부장에게서도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초이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박부장의 소식을 들었다.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몇 단계 건너서 박부장과 관계있는 사람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박부장은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와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초이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런데 그 여자는 초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박부장은 새롭게 만나는 여자 때문에 이혼할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