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을 맞잡고 뒤엉켜서 열정적으로 춤을 춥니다. 서로의 몸뚱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섞이고, 타액이 섞이고, 애액이 섞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봤자 머릿속의 생각은 각각 다릅니다. 2011 김충순, 210㎜ x 297㎜. 켄트지 위에 연필, 볼펜, 수채물감.


최은화. 초이는 자신의 한국 이름을 그렇게 알려줬었다. 최씨는 외국에서 흔히 초이로 불린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다다는 서부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오후의 햇빛이 게으르게 발을 뻗는 술집의 기다란 나무 테이블, 바텐더 앞에서 은으로 만든 동전 하나가 빙그르르르르 돌아간다. 햇빛이 은화에 닿는 순간 별이 폭발하듯 광채가 번뜩인다. 그때 바의 문을 열고 들어오던 총잡이가 허리춤에서 0.1초의 빠른 속도로 총을 뽑는다. 총소리, 그리고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은화가 천정으로 솟구친다. 술취한 손님들이 눈을 번쩍 뜨고 그 총잡이를 바라본다.
다다는 금화나 은화를 직접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은화보다 금화가 더 좋다는 것은 안다. 은화라고 할 바에는 금화가 더 좋지 않을까? 최금화. 그러나 그건 조금 웃긴다. 다다는 초이의 이름이 어쩌면 가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초이와 같이 있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여러 명의 초이와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이 속에는 여러 명의 초이가 있다. 말이 없고 내성적인 초이가 있는가 하면, 너무나 활달하고 사교적인 초이도 있다. 무리 밖으로 튕겨져나간 외로운 초이가 있고 사람들 속에 쉽게 동화되는 초이도 있었다. 바하를 듣고 마르께스의 소설을 재미있어 하는 초이가 있는가 하면,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경박한 리듬의 팝 음악에 몸을 흔들고 박수치는 초이도 있었다.
초이는 누구일까? 그녀의 벗은 몸을 껴안고 자신의 성기를 그녀의 질 깊숙이 집어넣는다고 해서 그녀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육체의 순간적인 결합에 불과하다. 초이와의 섹스는 육체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짜릿한 쾌감과 희열을 다다에게 안겨 주었지만,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갈수록, 피스톤 운동이 빠르고 격렬하게 반복될수록, 다다는 초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섹스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다의 손 끝이 그녀의 살에 슬쩍 닿기만 해도 입을 벌리고 하이 소프라노의 날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감전된듯이 몸을 부르르 떠는 이 여자가 진짜 초이일까? 섹스가 끝나고나면 조금 전까지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가 진짜 초이일까? 다다는 알 수 없었지만 더 혼란스러운 것은 그런 초이 곁을 떠나지 못하는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틀 후면 다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난다. 서울에 가면 또 다른 삶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부에노스를 떠나는 비행기만 타도 초이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기대라는 것을 다다는 알고 있다. 어쩌면 자신은 영원히 초이의 노예가 되어, 그녀를 거부하면서도 그녀가 부르면 그녀 곁으로 달려가야 할 것이다.
"정말 내일 떠나요? 그럼 우리가 마지막 밤을 보낸 건가요?"
아침 해가 떴다. 이틀 뒤가 아니라 이제 내일이다. 아직 가방도 싸지 못했다. 방송 촬영을 하면서 3주, 그리고 탱고를 배우면서 2주, 한 달 넘게 부에노스에 머물면서 벼룩시장이 열리는 일요일의 산뗄모 광장이나 탱고의 발상지인 보까에서 산 다양한 물건들이 방안에 쌓여 있었다.
"오늘밤도 있잖아."
"오늘밤은 다른 일이 있어서 만날 수 없어요."
"그럼 지금 헤어지면 정말 마지막인가?"
"부에노스에는 다시는 안올 거에요?"
"초이는 서울에 오지 않을 거야?"
"저도 관광 비자니까 3개월에 한 번은 나갔다 와야 해요."
아르헨티나는 비자 없이 3개월까지만 체류할 수 있다. 3개월이 지나기 전, 이과수 폭포에 가서 브라질 국경을 넘어갔다 오던가,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 관광이라도 다녀와야 불법이 아니다. 초이는 이미 이과수 폭포에 한 번 다녀왔다고 했다. 여권에 찍힌 입국 도장에서부터 다시 3개월이 지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몬테비데오의 밀롱가에 갔다 올까 해요. 우루과이에서는 탱고가 자기 나라에서 먼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잖아요. 우루과이 탱고는 어떤가 보고 오려구요."
"혼자 갈거야?"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다다는 물어보지 말 것을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이가 혼자 몬테비데오에 가지는 않을 것이다. 주말동안 박 부장과 함께 가겠지. 초이는 다다의 질문을 듣더니 침대 위에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의 등이 쓸쓸해 보였다.
"헤어질 거에요."
그녀의 작아보이는 등 뒤에서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 다다는 운전하던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덜컹거렸다. 초이는 다시 등을 돌려 다다를 바라보았다.
"박 부장과 헤어질 거에요."
다다는 초이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박부장과 헤어지고 자신과 만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뜻인지,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제 첫 남자에요. 첫 사랑은 아니지만, 대학 2학년 때 처음 만나 지금까지 같이 있었지만, 이제는 헤어질 거에요. 어떤 때는 제가 그 사람 곁을 떠나지 못했고 또 어떤 때는 그 사람이 제 곁을 떠나지 못했지만 이젠 정말 마지막이에요."
초이는 박 부장과의 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초이는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박 부장은 초이가 다니는 학교의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다고 했다. 시간강사라고 해도 학교에서는 교수님으로 통한다. 그들은 교수와 제자 사이로 처음 만났지만 특별한 관계가 시작된건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시험을 보고 여름방학이 막 시작될 무렵 그녀는 박 부장, 그때는 박 교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엑셀을 할 줄 아느냐고 묻더니 성적처리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박 교수가 강의하던 과목은 '디자인과 생활'이라는 교양과목이었고 인기가 많아서 수강생이 200여명이나 되었다. 출석체크와 레포트, 그리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점수를 합산하고 처리해야 하는데 수강생이 너무 많아 힘들다는 것이다. 더구나 박 교수는 엑셀을 할 줄 몰라서, 엑셀을 할 수 있으면서 도와줄 수 있는 학생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의 과목은 중강당의 계단식 강의실에서 마이크로 수업을 했는데, 초이는 그 많은 학생들 중에서 박 교수가 자신에게 전화를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처음에 당황했지만 그녀 역시 박교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때 초이는 친구들과 함께 한 달동안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조금 있었다. 그리고 성적처리를 하더라도 며칠이면 될 것이기 때문에 박 교수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