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었다. 비닐봉지가 땅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허공으로 가볍게 떠오른다. 다시 천천히 땅으로 내려와 비닐봉지가 발을 딛으려는 순간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비닐봉지는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라 나무 위로 솟구치며 작은 구름처럼 허공을 떠돌다가 다른 나뭇가지에 걸린다. 또 다시 바람이 불었지만 비닐봉지는 바르르르 몸을 떨기만 할 뿐 나뭇가지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비닐봉지는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던 가엾은 유랑생활을 멈춘다.

   
▲ 김충순. 수채화. 210㎜×297㎜

가르시아는 핸드폰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듣고 있던 음악을 바꾼다. 그의 귀에는 스마트폰과 연결된 이어폰이 꽂혀 있다. 하지만 그의 눈은 10여미터 떨어진 신호등과 횡단보도에 멈춰 있다. 그는 지금 건물 입구의 둥근 계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다. 스마트폰의 시간 표시를 보며 그는, 약속시간에서 이미 10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한다. 약속시간이 잘못 되었을 리는 없다. 그의 스마트폰 문자메시지 블럭에는 약속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는 문자가 저장되어 있다. 분명히 까를로스 가르델역에 있는 쇼핑센터 입구였다.
까를로스 가르델은 아르헨티나 탱고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어지는 1930년대의 대표적인 탱고 가수이다.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뿐만 아니라 목소리 이상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미남이었고 또한 뛰어난 탱고 댄서이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탱고라는 장르가 확실하게 대중들 사이에서 정착된 것은 전적으로 까를로스 가르델의 공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애연가이기도 했는데 그의 손에서 담배는 항상 떨어질 날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묘지에 있는 동상의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팬들이 불을 붙여 놓고 간 담배가 항상 꽂혀 있다.
가르델은 원래 프랑스 뚤루즈 출생인데 4살 때 어머니를 따라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을 왔다. 그는 1917년 '뚜르시의 밤'이란 노래로 탱고 가수로서 입문을 했고 900곡 가량의 노래를 취입했으며 많은 영화에도 출연했다. 여심을 흔드는 용모와 세련된 무대매너로, 부드러우면서도 귀족적 오만함이 넘치는 마초적 이미지로 탱고의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1935년 해외 공연을 가던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8세. 한창 활동하던 최전성기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지하철역 중에 까를로스 가르델 역이 있다. 가르델 역 주변에는 탱고화나 탱고 의상을 파는 크고 작은 샵들이 많이 있고 탱고 강습을 하는 교습소도 여러 군데가 있다. 가르시아는 탱고화와 의상을 구입하는데 통역과 안내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도움을 주기 위해 쇼핑센터 입구 계단에 앉아 있는 것이다. 15분이 지나서야 초이는 얼굴의 반을 가리는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고 모습을 나타냈다.
"뭐야, 일부러 늦은 것은 아니지?"
"수업이 늦게 끝났어. 우리 선생님 내일 결혼한다고 해서 축하 파티를 해주느라 조금 늦은 거야."
가르시아는 초이와 말을 놓고 지낸다. 가르시아가 초이보다 한 살 어리지만 친구하자고 먼저 프로포즈한 사람은 초이다. 스페인어에 익숙하지 않은 초이를 위해 가르시아는 그녀가 탱고화 5켤레와 손가방 3개가 넘는 분량의 탱고 의상을 사는 동안 통역을 했다. 3시간 후, 그들은 다시 까를로스 가르델역 근처의 쇼핑센터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저녁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초이는 맥주를 주문했고 가르시아는 아구아 한 병을 주문했다.
"박 부장님은 잘 지내?"
"응. 한국 본사에서 손님들이 와서 요즘 정신 없어."
가르시아는 빨대로 물을 깊숙이 빨아마신 뒤 억양의 변화 없이 묻는다.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일부러 그가 평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려고 하기 때문애 그래서 오히려 조금 더 어색한 말투가 되어버렸다.
"탱고는 열심히 추고 있어?"
"알잖아? 나, 몸으로 하는 거는 뭐든 잘한다는 거."
가르시아는 갑자기 풋풋 웃음소리를 내며 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초이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는다.
"침대 위에서 하는 거 말고."
"어? 농담 아냐. 자기도 알잖아. 나, 몸으로 하는 거는 뭐든 잘한다는 거. 그리고 빨리 배우잖아."
"그래, 인정."
가르시아는 초이의 탱고 실력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초이는 이제 라우라의 스튜디오에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까를로스 가르델역 근처에 있는 다른 탱고 교습소를 다니고 있다. 하지만 밀롱가를 다니는 곳은 비슷하기 때문에 라우라와 다다, 다나타 커플 등과 여러 차례 밀롱가 엘 베소나 까치룰루, 니노비엔, 라 비루따 등지에서 부딪쳤다고 들었다. 그러나 가르시아가 초이의 말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그녀는 정말 몸으로 하는 것은, 적어도 가르시아가 알고 있는 한 최고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는 여자였다. 그는 침대 위에서 초이의 몸을 안았던 것을생각해봤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다.
"부탁할게 있어."
초이는 맥주를 다 마신 뒤 가르시아의 눈을 보며 말했다. 가르시아 역시 단순히 탱고화 몇 컬레 사고 옷을 사는데 필요해서 초이가 자신에게 연락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르시아는 아무 말없이 초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람 좀 소개해 줘. 보기 싫은 사람 안보이게 해주는 사람들, 연락하는 루트 알고 있지?"
가르시아는 초이가 어떤 부탁을 할까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지만 자신이 상상도 못한 부탁이 초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초이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이 맞게 해석한 것인지 다시 그녀의 말을 되새김해 보았다.
'보기 싫은 사람 안보이게 해주는'이라는 문장은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가르시아는 그 문장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초이에게 그 뜻을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이 정말 맞게 해석하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만 했다.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알잖아,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하지만……."
"가능하면 빨리 연락 좀 줘. 비용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해야 되는지. 다만 부탁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은 철저히 감춰졌으면 좋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사람이 너밖에 없어."
가르시아는 가장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보기 싫은 사람이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