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수난의 역사
   
▲ 지난해 11월 북의 포격에 폐허로 변해버린 연평도 마을. 지붕이 날아가 집안이 해골처럼 드러났다. 주민들의 웃음과 대화가 흐르던 골목엔 포격 잔해만 수북이 쌓여있다. /연평도=박영권기자 pyk@itimes.co.kr


조선 중기 장수였던 임경업(林慶業)은 청나라의 위협에 쫓겨 피신하다 연평도 인근에서 심한 풍랑과 마주쳤다. 마실 물이 없던 그는 부적을 써서 바닷물에 띄웠는데 흙탕물이던 바닷물은 곧장 맑은 물로 변해 먹을 물을 구했다. 또 그가 바다에 가시나무를 꽂자 그 나무마다 큰 조기가 걸려 음식도 풍족하게 먹었다. 그의 시호는 충민(忠愍)인데 연평도에는 이 이름을 딴 충민사라는 사당이 있다. 앞의 얘기는 바로 이 사당에 얽힌 설화다. 그런데 임경업 장군의 충의와 지조가 담긴 섬. '드러누운 것처럼 평평하게 이어진 섬'이라 붙여진 이 연평도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한반도의 화약고로 변하고있다. 연평도는 1·2차 연평해전에 이어 11·23 연평도 포탄 공격에 이르기까지 온갖 험난한 일을 당했다. 연평도의 수난사는 비틀린 한국 근대사 그 자체이다.

지난 1999년 6월15일 오전 9시7분.
연평도 서쪽 10㎞ 해상(남측 NLL 2㎞)에서 우리 해군 고속정과 북한 경비정 사이의 선체 충돌이 일어났다.
당시 북한 경비정은 이미 6월초부터 매일같이 북방한계선을 넘어와 몇 시간씩 우리 영해에 머물다 돌아갔고 그러던 9일째 80t급 북한 경비정 2척이 꽃게잡이 어선 20척과 함께 북방한계선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왔다.
이어 420t급 경비정 2척이 어뢰정 3척의 호위를 받으며 우리 영해를 침범했고 우리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10여척을 동원, 6월15일 오전 9시7분과 9시20분 두차례에 걸쳐 북한 경비정 선체를 들이받아 밀어내는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자 북한 경비정은 소총으로 먼저 사격을 하다가 급기야 25㎜ 기관포를 발사했고 북한 어뢰정 3척 역시 공격에 가담했다.
우리 해군은 곧장 초계함의 76㎜ 함포와 고속정에 장착한 40㎜ 기관포로 응사해 북한 어뢰정과 경비정을 명중시켰다. 이 교전으로 북한 어뢰정 1척이 그 자리에서 침몰했고 420t급 경비정 1척도 크게 망가졌다. 또 나머지 경비정 4척도 선체가 부서져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해군 고속정과 초계함 등 2척 역시 북한 어뢰정이 쏜 27㎜ 함포에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장병 7명이 부상을 당했으나 전사자는 없었다.
반면 북한은 이날 공격으로 20여명이 숨지고 30여명이 크게 다쳤다.
교전이 끝난 한 시간 뒤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장성급 회담을 갖고 연평 교전을 거론했지만 서로 다른 입장만 보인 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날 회담에서 북한은 우리 해군이 먼저 도발했으며 북방한계선이 국제법상 북한에서 12해리 안쪽에 있는 만큼 북한 영해라는 억지 주장을 폈다.
수십년간 우리 관할구역으로 여긴 북방한계선을 일방적으로 무시한 채 12해리 영해라는 논리로 북방한계선을 차지하려는 북한의 전술적 의도가 드러난 것이다.
2002년 우리나라는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다.
4강 진출 환희에 젖어 모든 국민이 열광에 휩싸인 순간 북한은 또다시 도발을 감행했다.
월드컵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2002년 6월29일 오전 10시25분 연평도 서쪽 22.4㎞ 해상에서 2차 연평해전이 벌어졌다.
교전에 앞서 북방한계선 북한측 해상에서 북한 꽃게잡이 어선을 경호하던 경비정 2척이 우리 북방한계선을 침범하며 계속 내려온 것.
이 때문에 우리 해군 고속정 4척이 즉각 대응에 나서 초계와 함께 경고방송을 하며 교전 대비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아무런 징후도 없이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선제 기습포격을 시작했고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 조타실이 순식간에 불로 뒤덮였다. 이 때부터 양측 함정끼리 교전에 들어갔고 인근 해역에 있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들이 추가로 교전에 합류했다.
이어 이날 10시43분쯤 북한 경비정 1척에서 화염이 생기자 북한은 나머지 1척과 퇴각, 10시50분쯤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상하면서 2차 연평해전은 25분만에 끝났다.
하지만 이 교전으로 우리 해군 윤영하 소령과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6명이 전사했으며 19명이 부상을 입었다.
여기에 해군 고속정 1척도 침몰했는데 당시 북한의 피해상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교전 직후 국방부는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한 만큼 이는 명백한 무력도발'이라고 규정하고 북한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강하게 요구했으나 끝내 북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1·2차 연평해전 이후 11년만에 북한은 연평도 뭍을 향해 무력도발을 저질렀다.
2010년 11월23일 오후 2시30분 연평도엔 북한이 발사한 포탄 수백여발이 떨어졌다.
우리 군이 육해공 연합 호국훈련을 하자 북한이 개머지 해안포기지에서 76.2mm 평사포와 122mm 대구경포, 130mm 대구경포 등을 이용해 연평도 군부대와 인근 민가에 포격을 가한 것. 이에 우리 군은 곧바로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고 K-9자주포 80여발을 무도와 개머리 포진지에 쐈다.
이 포격으로 연평도에서 복무하던 해병대원 2명(故 문광욱 일병·故 서정우 하사)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도 목숨을 잃었다. 또한 연평도 주택 12동이 모두 부서지고 25동은 불에 탔으며 차량 3대와 컨테이너 박스도 여러 채 망가졌다. 연평도 곳곳에선 산불도 발생했다.
대다수 연평도 주민들이 생지옥을 경험하며 뭍으로 대피했고 찜질방 생활 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한편 남북 교전 때문에 민간인이 사망한 건 한국전쟁 이후 처음있는 일로 국제 사회의 눈과 귀가 순식간에 연평도로 쏠렸다. 중국을 뺀 각국 정부는 북한의 무력도발을 규탄했으나 북한은 우리 정부에 책임을 떠넘기며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우리 정부는 교전수칙 수정과 강력한 응징, 사해5도의 군전력 증강 방침을 세운 뒤 지난달 20일엔 연평도 일대에서 해상사격훈련을 강행했다.
이로 인해 북한의 추가도발 위협 등 남북간 긴장감은 더욱 커지면서 전쟁공포 분위기가 확산되기도 했다.
현재 연평도 피란 주민들은 김포 아파트로 이주하고 현장에선 복구작업이 벌어지는 등 다시 안정을 찾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추곡수매와 굴채취 등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이 제2·3의 타격을 예고한 상태여서 추가 도발의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이다.
일부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연평도를 떠나려고 하고 있고 꽃게잡이 등 생업을 잃은 주민들은 가슴앓이만 하고 있다.
특히 백령도와 대청도 등 나머지 섬 지역과 인근 강화와 김포 시민들도 여전히 전쟁 불안에 떨고 있다.
우리 정부가 연평도 등 서해5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무엇보다 주력해야 하는 이유다.


/황신섭기자 hss@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