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사 칼럼 - 김흥규(고려대 국문과 교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인천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 중에서 원래의 인천 토박이들은 별로 없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1883년에 개항하면서 성립한 근대도시 인천의 인구는 대부분이 외부로부터 유입되었다. 그 중에는 중소기업인, 기술자, 하급 관리 등도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가 부두나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소상인, 행상, 잡역부 등의 저소득층에 속했다. 6·25에 따른 대대적 민족 이동은 인천 인구의 규모와 외래 비율을 다시 한번 획기적으로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부모들에 의해 인천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그래서 인천을 고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출현한 것은 대체로 1940년대 이후의 일이다. 1948년생인 나도 그런 세대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 자신도 청소년기까지는 인천이라는 지명 앞에 고향이라는 감동적 수식어를 붙여서 생각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인천은 밖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곳이었고, 끊임없이 오가는 물자와 인구 속에서 조용할 날이 없는 북새통이었다. 그러니 '뻐꾹새 울고 찔레꽃 피는' 고향의 상투적 이미지는 애시당초에 인천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세월을 거쳐 나이 30이 넘을 때부터 인천을 떠나 살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인천을 고향이라는 이름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단순히 '고향을 떠나야 고향을 안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성년기까지 내가 경험한 인천은 '가진 것 별로 없는 목숨들'이 절박하게 부딪치면서 나날의 삶을 만들어 간 현장이었다. 거기에도 물론 빈부와 권력의 굴곡이 있었겠지만, 다른 도시들보다는 그 차이가 적었다. 전근대의 내력을 뽐내는 지역에 흔한 토착세력의 텃세 같은 것도 약했다. 인천 사람들은 대부분이 뿌리 없는 뜨내기들이었고, 그런 만큼 평등한 마음과 태도가 열려 있었다. 먼저 살던 고장에서 어떤 재산이나 문벌을 가졌든 간에 부두에서 짐을 나르고, 배다리 시장에서 고무신을 팔거나, 몇푼 안되는 물건들을 이고 구름다리와 싸리재 고개를 다녀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경인선 열차에 생선 함지를 싣고 그 비린내 때문에 승무원들의 구박을 받으면서 영등포, 용산 등지로 장사 다니던 아주머니들을 잊을 수 없다. 6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내 또래 젊은이들은 그 비린내가 무척 거북했지만 그래도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을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분들은 젊은 대학생들 중 누구인가의 어머니이거나 친족 또는 이웃이었다. 시적으로 말하건대 인천에서 생장한 사람들은 모두 그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의 아들·조카이거나 손자다.
1세기 남짓한 역사를 거쳐 국제도시로 성장한 인천의 과거를 이렇게 되짚어 보면서 나는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의 평등한 마음과 열린 태도가 오늘날에도 소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천은 원래부터 항구도시였거니와, 인천 국제공항의 위용을 자랑하고 송도 국제도시를 만드는 오늘날에도 온갖 물자와 인구가 오가는 항구로서 자기 정체성을 키워야 한다. 가진 자들 끼리의 연고주의나 먼저 자리잡은 세력의 텃세가 성행한다면 항구도시의 유동성과 창조성은 질식하게 된다.
인천을 떠나서 30년을 더 사는 동안 내 마음 속에 간직된 고향 인천의 초상은 바로 그런 항구의 개방성과 생존 의욕 그리고 서로 으스대지 않고 손잡을 줄 아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였다. 인구 300만에 육박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해서 이런 이미지를 버릴 일은 아니다. 인천은 여전히 항구이며, 이동과 변화를 탄력적으로 수용하는 도시로 발전해야 한다. 인천 사람들의 문화와 도시행정 속에 그런 기풍이 계속 살아 있을 때 우리는 가진 것이 적지 않으면서도 마음이 따뜻하게 열린 사람들의 도시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김흥규(63) 교수는 …

- 인천중, 제물포고 졸업
- 고려대 국문학 박사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 주요저서: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한국 고전문학과 비평의 성찰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