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 김충순

음악이 끝났다. 딴다와 딴다 사이에 흘러나오는 꼬르띠나는 밀롱가마다, 그리고 디제이마다, 다르다. 꼬르띠나를 들어보면 그 디제이의 개성을 알 수 있다. 탱고 음악과는 다르게 이제 잠깐 쉬는 시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는 꼬르띠나는 보통 경쾌한 팝 음악이 많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어떤 디제이는 클래식을 선택하기도 하고 혹은 힙합 음악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탱고 클럽 '비엥 뽀르떼뇨'의 디제이는 에미넴의 힙합 음악을 내보냈다.

밀롱가 분위기를 좌우하는 것은 디제이다. 디제이가 그날 어떤 음악을 선택하고 배열하는가에 따라서 똑같은 공간이라도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디제이를 따라 많은 땅게로스들이 밀롱가를 이동한다. 탱고를 출 때 그만큼 디제이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보통 밀롱가 음악은 탱고 4~5곡이 연속으로 흘러나오는 한 딴다, 다음 다시 탱고 4~5곡이 흘러나오는 딴다 뒤에 조금 빠른 곡의 발스나 밀롱가가 한 딴다 배치된다. 딴다는 묶음이라는 뜻이다.

초이가 에미넴의 힙합 음악에 몸을 흔들며 테이블로 돌아오다가 다다와 눈이 마주쳤다. 초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교태로웠다. 다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가르시아의 말을 듣기 전이라면, 또 다르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초이는 달라 보였다. 초이가 걸어 오자 가르시아가 옆 자리로 한 칸 옮겨서 초이는 다다의 바로 왼쪽 의자에 앉았다. 동시에 다른 쪽에서 셀마도 춤을 마치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보통 꼬르띠나는 30초에서 1분정도 지속된다. 다다가 앉아 있는 테이블 옆으로 왼쪽에 초이, 가르시아. 그리고 오른쪽에 라우라와 셀마, 다나타 커플이 앉았다.

"초이, 셀마 알지?"

라우라의 말을 듣고 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셀마와 베소를 했다. 셀마가 아르헨티나에 온지 얼마 안되었지만 라우라를 매개로 모두 한두 번 안면이 있는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자기들끼리는 각각 한국어와 일본어로 대화하지만 서로 대화를 할 때는 영어와 스페인어가 뒤섞인다. 탱고를 추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조금씩 스페인어를 하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혹은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영어로 대화를 시도한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4개 국어가 서로 뒤섞이며 테이블 사이를 날아다녔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초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다다의 팔을 슬쩍 쳤다. 다다는 어색하게 웃었다. 스스로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다다의 얼굴이 미소는 지었지만 딱딱하게 굳어있다는 것을 초이는 알았다. 초이는 다다의 팔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손을 빠르게 거두었다. 무엇인가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꼬르띠나가 끝나고 새로운 탱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라우라가 다다를 바라보았다. 다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라우라와 홀딩을 했다.

라우라의 몸은 마치 모치나 찹살떡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라우라의 뭉클한 가슴이 다다의 가슴으로 느껴졌다. 다다는 긴장했다. 초이와 같이 잔 후 라우라를 보는 것이 어색해졌다. 라우라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다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이다. 그런데 다다는 라우라의 제자인 초이와 잤다. 그것도 라우라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라우라와 홀딩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이다.

음악이 흐르자 다다는 한 발자국씩 내딛었다. 역시 라우라는 고수였다. 셀마나 초이와 춤을 출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다다의 몸에 밀착해서 하나의 호흡을 만들어냈다. 음악을 듣고 어디로 갈 것인지, 얼마만큼 스텝을 내딛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남자의 몫이지만, 함께 홀딩한 여자가 긴장하고 딱딱하면 아직 초보인 다다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다. 머리 속이 눈덮인 개마고원처럼 하얗게 변해가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라우라는 다다의 마음과 몸을 편하게 해주었다.

이상하다. 몸이 맞으면 마음도 맞는 것처럼 생각된다. 처음 본 사람이라도 탱고 한 곡을 추면서 몸이 가까워지면 마치 영혼이 닮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라우라와 초이, 그리고 셀마. 다다는 이 세 여인과 모두 탱고를 추었다. 탱고만 생각하면 물론 라우라가 최고였다. 하지만 몸이 가장 잘맞는 사람은 역시 셀마였다. 다다 주변에 기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라우라와 가르시아는 알고 있었겠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새벽 2시가 지났다. 다나타 커플은 피곤하다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한 딴다만 추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다다는 셀마와 홀딩을 했다. 춤을 추는 동안 셀마는 다다의 귀에 속삭였다. "비엥"

그리고 다시 속삭였다. "무이 비엥". 다다도 셀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땀비엔" 셀마는 좋아, 아주 좋아라고 말했고, 다다는 나도 그렇다고 속삭였다. 탱고를 추는 것이 좋은지, 기분이 좋은지,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 그들은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춤이 끝나고, 모두들 클럽 밖으로 나왔다. 가르시아와 라우라는 먼저 출발했다. 차에 타면서 라우라는 다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다는 라우라에게 눈 인사를 하려고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라우라는 셀마와 초이에게 손을 흔들고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가르시아만 운전석에 오르기 전 다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걱정된 눈빛이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다다와 셀마 그리고 초이뿐이었으니까. 잘해봐. 하지만 걱정돼. 가르시아는 그런 눈빛이었다.

다다는 초이가 먼저 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초이는 택시를 잡지 않았다. 다다 옆에 서서 오히려 셀마가 먼저 택시를 잡기를 기다렸다. 셀마는 다다와 초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때 초이가 다다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조금 옆쪽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나, 할 말 있어요. 지금 시간내줄 수 없어요?"

다다는 망설였다. 초이와는 더 이상 관계를 진전시키고 싶지 않았다. 다다는 셀마를 잠깐 바라본 후 초이에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갔으면 좋겠는데."

"잠깐이면 돼요."

다다는 다시 한 번 셀마를 바라보았다. 초이도 셀마를 바라보았다. 셀마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일본어로 대화를 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으로 국제전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새벽 2시가 넘었고 지금 이곳에 있는 일본인과 전화할 시간은 안되지만, 일본은 한국과 시간대가 똑같기 때문에 낮 2시가 지난 것이다. 셀마가 다다에게 물었다.

"저 년이랑 잤어?"

다다는 깜짝 놀랐지만, 셀마는 한국어를 모른다. 그래도 바로 옆에서 듣는데, 그런 표현을 하니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다다는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초이는 다시 셀마를 바라보았다.

"잤는데 뭐. 테크닉도 좋아."

여자를 유혹하는 테크닉이 좋다는 것인지, 섹스의 테크닉이 좋다는 것인지, 불분명했지만 다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초이는 다다가 셀마와 잤다고 확신했다. 서로 모른척하고 있어도 연인들끼리는 표시가 나는 것처럼, 같이 잔 사이는 그렇지 않은 남녀 사이에 비해서 확실히 다르다. 뭔가 안개가 발밑으로 낮게 흐르듯 스물스물 그런 기운이 두 사람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딱히 물증이 없어도 조금만 예민한 주변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알 수가 있다. 다다와 초이 사이가 금방 라우라와 가르시아에게 들켰듯이, 다다가 셀마와 잤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정황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초이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저 년이랑은 다음에 또 자면 되잖아. 오늘은 나랑 얘기 좀 해요."

초이의 말이 단호하기도 했지만, 다다도 더 이상 초이와의 관계를 끌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지금 얘기하는게 좋을 수 있다. 다다는 셀마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셀마의 전화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아마 친구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생활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았다. 밝은 목소리로 한층 기분이 좋아져서 깔깔거리며 전화를 했다. 전화가 끝나자 다다는 셀마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영어로 얘기를 했다. 내일 만나자고 덧붙였다. 셀마는 다다와 초이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다가 택시를 잡았다. 셀마가 사라지자, 초이는 먼저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없이 걷는 초이의 뒤를 따라 다다도 걸었다. 새벽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불꺼진 거리에는 셧터문이 내려진 가게들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초이가 걸음을 멈추었다.

"가요."

그리고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에게 능숙한 스페인어로 목적지를 말했다. 다다의 호텔이었다.
그들은 호텔에 도착해서 방에 올라갈 때까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문이 닫히자 초이가 외투를 벗어 소파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침대 모서리에 앉았다.

"왜 나한테 그렇게 대해요?"

"뭐가."

"왜 날 차갑게 대하냐구요?"

"할 얘기가 있다는게 그거였어?"

"이상하잖아요. 왜 갑자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거에요? 나랑 같이 잔게 후회돼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나랑 한 번 자고 나니까, 이제 내가 싫어졌어요? 당신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룻밤 자려고 나를 유혹한 거에요?"

초이가 자기를 먼저 유혹한 게 다다라는 말을 하자, 다다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분명히 초이가 먼저 다다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그런 걸로 초이와 언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초이와 잔 것은 분명한 일이니까. 그러나 다다를 대하는 초이의 태도가 상식 밖이었다.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이 피해자라는 식으로 다다를 대하는 게 참을 수 없었다.

"말 함부로 하지마. 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더 이상? 언제는 우리가 만나기나 했어요? 난 이제 겨우 좋은 사람 만났다 생각했는데, 내가 사람 잘못 봤나요?"

초이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