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라도 내부에는 두 명 이상의 다른 여자가 숨어 있다. 눈으로 볼 때와 가슴으로 안을 때, 절대 같은 여자가 아니다. 셀마도 그렇다. 그녀는 키가 작고 몸이 가냘픈 편이었지만, 다다가 탱고를 추기 위해 그녀의 등에 손을 대고 가슴과 가슴을 맞댄 순간, 단단한 그 무엇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몸은 작지만 속이 꽉 찬 열매처럼 단단했다.
그런데 음악을 듣고 첫 스텝을 움직이는 순간, 셀마의 그 단단한 몸이 말할 수 없는 부드러움으로 변신해서 다다의 몸을 휘어 감는 것이다. 다다와 셀마의 가슴은 1밀리미터의 빈 공간도 없을 정도로 맞닿아 있었다.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의 심장은 더 크게 쿵쾅거렸다.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다다의 가슴에 밀착되어서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아니다, 출렁거릴 공간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의 상체는 빈틈없이 밀착되어 있었지만, 다다는 셀마의 가슴이 출렁거리는 느낌이 섬세하게 자신의 상체로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 요즘 작업하는 연작입니다. 만나고, 사랑하고, 돌아서면 또 보고 싶고, 내 마음을 나도 모르는 채 그리운 건 무엇일까? 2010년 김충순 그림. http://blog.daum.net/minari56

다다의 왼손에서 셀마의 오른손으로 충전된 에너지가 흘러나갔다.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어 다다가 움직이는 대로 셀마는 따라 움직였다. 다다가 앞으로 걸으면 그녀는 뒤로 걷고 다다가 왼쪽으로 걸으면 그녀는 오른쪽으로 걸었다. 서로 마주 보고 홀딩한 상태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마치 그림자처럼 한 몸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다다는 갑자기 황홀해졌다. 그녀와 함께 그냥 이대로 끝없이 걷고 싶었다.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몸에 딱 맞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처럼, 그녀와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사람의 감정은 금방 상대에게 전달이 된다. 다다가 느끼는 이 황홀한 기분이 셀마에게도 전해졌다. 셀마 역시 다다와 호흡이 잘 맞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은 말로 하지 않아도 그대로 전달된다.
아, 이래서 밀롱가에 가는 것이구나. 다다는 왜 밀롱가에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사람마다 홀딩하는 느낌이 다 다르고 리드와 팔로우가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곡을 춰도 사람이 바뀌면 전혀 다른 느낌으로 탱고를 춘다. 탱고를 3분동안의 사랑이라고 한다. 탱고를 출 때만큼은 이 여자가 내 여자다, 혹은 이 남자가 내 남자다라는 느낌으로 춤을 춘다. 그런 감정의 교류가 없으면 그 춤은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탱고바에 갈 때는 혼자 간다. 파트너와 함께 가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 혼자 탱고바에 간다.
싱글스 밀롱가의 경우, 커플끼리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싱글스 밀롱가는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의 좌석을 분리해서 마주 보고 앉게 자리 배치를 한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남녀가 서로 까베세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까베세오란, 눈으로 춤 신청을 하는 것이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남자들은 여자들이 앉아있는 쪽을 향해 끊임없이 시선을 던진다. 그러다가 어떤 여자와 눈이 마주쳐서 춤을 추자는 사인을 보내고 그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면 다음 곡이 시작하기 전, 플로어로 나가는 것이다.
셀마의 머리가 다다의 뺨에 닿았다. 그녀의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지만 탱고화를 신으면 키가 170센티미터 정도로 커진다. 보통 밀롱가에서 신는 탱고화의 굽은 9센티미터다. 어떤 땅게라는 13센티 굽을 신고 탱고를 추는 경우도 있다. 셀마의 탱고화도 9센티에서 10센티 정도로 높았다. 남자들의 탱고화는 보통 구두와 비슷하다. 만약 셀마와 다다가 맨발로 서 있다면, 가령 호텔방 같은 데서 샤워를 한 뒤 서로 껴안는다면 셀마의 머리가 다다의 턱 조금 위에 올 것이다. 하지만 탱고화를 신고 플로어로 나가는 순간, 셀마의 키는 절대 작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 아주 잘 어울리는 데요?"
탱고 한 곡을 다 추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라우라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복잡한 느낌으로 뒤엉켜 있었다. 다다는 그 눈빛 속에서 애증을 읽었다. 다다에 대한 애정과 증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증오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라우라와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적도 없었다. 그들 사이에 확실한 그 무엇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서로 어떤 친밀한 감정이 흐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다는 이런 애매한 상태가 싫다.
셀마도 다다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복잡한 우회도로를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횡단보도를 건너 다다에게 왔다.
"나, 당신이 좋아. 우린 참 잘 맞아."
다다와 셀마 사이에는 라우라의 통역이 필요했다. 셀마가 일본어로 말하다가 스페인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노 잉글리쉬?"
다다는 셀마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시도를 해보았지만 셀마의 얼굴은 휴지통에 던져지는 구겨진 종이처럼 금방 일그러졌다. 엄지손가락으로 집게손가락의 끝부분을 조금 잡으며 "리틀"이라고 대답한다.
일본인들이 특히 발음 때문에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가 크다는 말은 들었지만, 참으로 난감했다. 다다도 영어를 능숙하게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영어 이외의 소통 방법은 없다. 그는 일본어도 스페인어도 할 수 없다. 조금 전, 탱고를 출 때만 해도 마치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처럼 서로 밀착해서 한 덩어리가 되어 춤을 췄다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다와 셀마 사이는 언어 때문에 갑자기 멀어져버렸다.
두 사람을 연결해주는 것은 라우라였다. 라우라는 일본어와 스페인어가 뒤죽박죽 섞여진 셀마의 말을 다다에게 한국어로 쉽게 풀어서 전해주었다.
"얘가 다다에게 반했나 봐. 느낌이 아주 좋다고,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하는데요?"


다다는 그 순간 초이를 생각했다. 어제 밤 돌아가서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서울에서 로밍해 온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초이에게 먼저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이는 그랬다.
"난 내가 좋은 남자에게 내가 먼저 만나자고 말해. 남자들이 만나자고 전화하고 그러는 거 싫어. 나도 전화 받기 싫을 때가 있잖아? 그런데 전화가 오면 언제 어느 때건 무조건 받아야 하나? 뜨거운 물을 받고 욕조에 앉아서 쉴 때도 있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편하게 누워 있을 때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면 짜증이 나."
그때 라우라가 주섬주섬 핸드백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떡하죠? 그런데 난 저녁 약속이 있어요. 내가 없어도 괜찮겠죠? 아니면 구마모토에게 부탁해 볼까요?"
아니다. 절대 안 괜찮다. 어떻게 셀마와 대화를 할 것인지 난감했다. 방법은 라우라의 말대로 구마모토와 다나타가 그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것이다. 셀마가 일본어로 말하고 구마모토가 영어로 번역해서 다다에게 전해주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구마모토와 다나타도 조금은 시간이 되지만 오래 같이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다른 약속이 있다는 것이다.
"가르시아에게 시간 있느냐고 물어볼까요?"
다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남녀가 저녁을 먹고 데이트를 하는데 굳이 통역이 필요할 것까지는 없다. 다른 사람들을 수고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복잡하게 꼭 셀마와 저녁을 같이 먹어야 하는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새 셀마는 오래된 연인처럼 다다의 팔을 끼고 서 있었다.
"식사하고 밀롱가 올 거죠?"
그들은 모두 흩어져서 각자 자기 볼일을 보다가 밤 11시에 밀롱가 '비엥 뽀로떼뇨'에서 만나기로 했다. '비엥 뽀르떼뇨' 그러니까 좋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람들이라는 뜻의 밀롱가는 국회의사당 주변에 있다. 다다는 라우라에게 주소를 받아 들었다. 국회의사당 주변이니 찾기는 쉬울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모두들 흩어지고 다다와 셀마 두 사람만 남았다. 셀마는 여전히 다다의 팔을 끼고 있었지만, 어떻게 의사표시를 할 수가 없었다. 다다가 아주 쉽고 간단한 영어로 말하고 셀마는 그것을 듣고 몸으로 표시했다. 셀마의 영어 수준은 어느 정도 들을 수는 있지만 말하기가 안되었다.
그들이 30분동안 길 위에 서서 나눈 대화는, 넌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 고기 먹을래? 스파게티는 어때? 식당은 어떤 곳이 좋을까? 이게 전부였다. 다다가 말하면 셀마는 더듬더듬 영어로 말하다가 스스로 답답해서 일본어로 얘기했다가 다시 몸으로, 바디랭귀지로 표현하고 다다는 그것들을 종합해서 무슨 뜻인가 이해하는 복잡한 과정이 반복되었다. 차라리 탱고나 춘다면 이 모든 복잡함이 사라질 것 같았다.
"우리 집 갈래?"
셀마는 말했다. 다른 단어는 모르겠는데, 호텔이라는 단어는 선명하게 발음했다. 다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셀마는 꼬리엔테스 애브뉴에 있는 바우엔 호텔에 묵고 있었다. 구마모토와 다나타 커플이 근처에서 방을 얻어 살고 있다고 했다. 물론 이런 정보도 바디랭귀지로 한참을 시도한 끝에 알아낸 것이다.
바우엔 호텔은 두 개가 있는데 바우엔 수이테 호텔과 그냥 바우엔 호텔이 걸어서 5분 거리도 안되는 곳에 떨어져 있다. 꼬리엔테스 애브뉴에 있는 바우엔 수이떼 호텔은 하루 숙박료가 15만원이 훨씬 넘는 비싼 호텔이다. 셀마는 그냥 바우엔 호텔에 묵고 있었다. 바우엔 호텔은 낡고 오래되었지만 전통이 있는 호텔이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호텔 로비에서 룸으로 올라가는 안쪽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들어가는데, 경비가 못 가게 막았다. 투숙객이 아니면 룸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친구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셀마가 프론트로 가서 한참 서 있다가 돌아오자 경비는 다다가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게 했다. 셀마가 오늘 하루만 2인 요금을 지불한 후에야 들어가게 한 것이다.
셀마의 방은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다. 호텔 메이드가 깔끔하게 정돈한 침대 위의 하얀 시트가 눈부셨다. 셀마는 커튼을 쳤다. 그리고 다다에게 키스를 했다. 한 마디 형식적인 대화도 필요없이 방에 들어오자마자 굶주린 짐승처럼 그렇게 셀마는 다다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