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났지만, 마음을 다독거리며 그냥 내려놓았더니 이젠 편해졌습니다. 파란색 물감을 던져 마무리 지은 그림. 2010 김충순 그림.

다다는 결정해야만 했다. 몸을 두 개로 분리하지 않는 한, 두 여자를 모두 따라갈 수는 없다. 아바타가 있다면 라우라와 함께 밀롱가로 보내고 자신은 초이와 갈 수도 있을텐데. 하지만 지금 그의 몸은 하나였다. 라우라의 등 뒤에 서 있던 초이가 눈짓으로 거부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다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어제 무리를 해서 오늘은 몸 상태가 좀 안 좋아요."
라우라는 더 이상 다다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다다는 이대로 그녀를 보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라우라가 오해하는 것은 아니다. 초이와 잔 것은 사실이니까. 그래도 그녀가 상처 받지 않도록 기분을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초이가 다다의 팔짱을 꼈다.
"가요, 우리."
라우라는 분명히 다다가 자신을 불러 세워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하지만 다다는 그럴 틈도 없이 초이에게 팔을 붙잡혔다. 그리고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고 먼저 올라탄 초이에게 끌려 차 안으로 들어갔다. 택시가 라우라를 스쳐 지나갔다. 라우라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다다는 그녀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흐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택시는 이제 막 출발했기 때문에 서서히 라우라 곁을 스쳐 지나갔고, 라우라는 등 뒤에서 초이가 택시를 잡는 소리, 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지 않았다. 라우라의 눈에 진짜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다다가 초이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초이는 택시 드라이버에게 다다가 묵고 있는 레지던스 호텔의 주소를 댔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다다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어젯밤처럼 또 격렬한 섹스를 할 것이다. 테이블에는 와인 잔이 놓여 있을 것이고, 침대 옆에는 벗어던진 초이의 속옷이 청소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거리의 낙엽처럼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다다는 초이의 알몸 위에서 그녀의 단단하게 솟아오른 까만 젖꼭지를 바라보며, 탱고를 출 때보다 더 몰입해서 피스톤 운동을 할 것이고, 초이의 입에서는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목을 졸라줘요"라는 부탁이 흘러나올 것이다. 다다는 초이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지고 숨이 끊어질 듯이 컥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더 세게 눌러줘"라고 그녀는 부탁한다. 다다는 못들은체 한다. "뭐라고?" "더 세게 눌러 달라고요" "다시 한 번 말해봐" "더 세게 좀 더 세게 눌러 달라고" 다다는 소리친다. "이 년이 누구에게 반말이야. 정중하게 부탁하지 못해?" "잘못했어요" "그래, 잘못한 걸 아니까 용서해주지. 다시 한 번 정중하게 부탁해봐."
다다는 말을 하면서도 피스톤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더욱 힘차고 강렬하게, 그리고 라르고에서 렌토로 다시 아다지오에서 안단테, 안단티노, 모데라토, 알레그레토, 알레그로로 점점 더 속도를 올린다. 강렬함이 반복되면 강렬함은 어느새 지루한 반복에 불과하게 된다. 빠르게 반복되면 역시 빠른 속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숙련된 연주자는 빠르게와 느리게를 효과적으로 잘 조절해야 한다.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잘 뒤섞어야 한다.
다다는 왼손으로는 침대 매트리스를 짚고,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브이자로 벌려서 초이의 목을 조른다. 손가락에 더욱 힘을 실어 그녀의 목을 조른다. "더, 더"라고 초이는 소리친다. 다다는 피스톤 운동을 알레그로에서 비바체, 비바치시모, 프레스토, 프레스티시모, 프레스트시시모, 프레스트시시시모로 급상승시킨다. 초이는 이제 아무 말이 없이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 있다. 다다는 갑자기 겁이 벌컥 나서 초이의 목을 조르던 손에 힘을 빼고 바라본다. "후우-" 초이의 숨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눈을 뜨고 묻는다. "어때, 좋죠?"그들은 이렇게 1시간이 넘게 여러 가지 체위를 바꿔가며 섹스를 할 것이다. 그리고 섹스가 끝난 뒤에는 그녀를 뱀처럼 껴안고 잠들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초이는 섹스가 끝난 후 또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섹스가 끝난 후에 알몸으로 있는 것을 부끄러워 하며 속옷을 찾아 입는 경우는 있지만,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옷을 찾아 입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여기는 아르헨티나, 한국과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레지던스 호텔이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모나 형제도 없다. 그런데 초이는 섹스가 끝나자마자 다시 옷을 입는다.
"가?"
다다는 침대에 누워서 옷을 입는 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늦었잖아요."
"자고 가면 안돼?"
"전 어릴 때부터 잠은 반드시 집에서 자야 한다고 배웠고 그게 습관이 됐어요."
"하지만 여기는 집이 아니잖아?"
"그래도 현재 내 옷이 있고 가방이 있는 곳이 집이죠."
다다는 더 붙잡을 수가 없었다. 초이가 간 뒤에 혹시 그녀가 혼자 사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와서 다른 남자와 같이 살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그동안 여기 뽀르떼뇨를 만난 것일까? 서울깍쟁이, 혹은 뉴요커처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사람들을 뽀르떼뇨, 즉 항구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부른다.
탱고를 추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온 동양 여자들은 일본인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녀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열심히 몇 년 일해서 부에노스로 온다. 그리고 또 돈이 떨어질 때까지 여기 머문다. 전세계 어디를 가도 이곳만큼 탱고 인프라가 풍부한 곳은 없기 때문에, 탱고를 추는 사람들은 누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고 싶어 한다. 일본 땅게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탱고를 잘 추는 멋진 뽀르떼뇨 땅게로를 만나 같이 살면서 탱고를 추는 것이다. 혹시 초이도 벌써 그런 대열에 합류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초이는 탱고를 배우기 위해 혼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 온지 이제 겨우 네 달이다. 그 사이에 벌써 남자를 만났을 리는 없다. 물론 처음 만나자마자 눈에서 불꽃이 튀면서 함께 동거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 다다와 초이도 두 번째 만났을 때 같이 잤다. 네 달이면 여러 명의 남자를 충분히 만날 수도 있는 시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다다는 괴로워졌다. 가슴이 답답했다. 초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에게 정말 다른 남자가 있는 것일까?

라우라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라우라가 하는 탱고레슨은 일주일에 두 번이었다. 수업을 받으려면 이틀을 더 기다려야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하루에도 수백개의 탱고 클라스가 열린다. 그래서 다다는 요일별로 다른 클라스를 찾아 들으며 탱고를 배울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낮 12시쯤 일어나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오후에 시작하는 탱고 클라스를 찾아가 수업을 한 후, 다시 저녁 수업을 듣고 밤에는 밀롱가에 갈 계획을 갖고 있었다. 밀롱가는 보통 새벽에 끝나니까 숙소로 들어오면 새벽 4시경이다. 그때 잠을 자서 다시 다음날정오에 일어난다. 이렇게 탱고만 배우고 탱고만 추는 꿈같은 생활을 2주일동안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호텔방에 연결된 전화기로 들려온 라우라의 목소리는 매우 밝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그녀의 경쾌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다다는 어제 보았던 라우라의 눈물은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라우라는 탱고를 배우기 위해서는 실력이 좋은 파트너가 반드시 필요한데, 아주 좋은 땅게라를 구했으니 빨리 나오라는 것이었다. 다다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라우라는 전화를 끊었다.
셀마는 키가 작았다. 160센티미터 정도였다. 그리고 동안이었다. 처음에 다다는 그녀가 25살쯤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32살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더 놀란 것은 그녀가 일본인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 다다는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녀가 한국인인줄 알았다. 그런데 라우라는 셀마와 대화를 할 때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서 썼다. 셀마는 일본인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어서 일본어로 말하지 않는 한 명동이나 압구정동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다. 키는 작았지만 몸은 단단했다. 한 눈에 근육이 잘 발달되었고. 몸의 발란스가 매우 좋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쇄골이 특히 아름다웠다. 어렸을 때부터 발레를 했고, 탱고를 배운지는 반년 밖에 안되지만 실력은 아주 뛰어나다고 라우라가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셀마 역시 라우라의 제자였다.
셀마는 다른 두 명의 일본인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탱고 커플이었다. 구마모토와 다나타라는 그들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연인 사이었고 도쿄에서 탱고를 배우다가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여자인 구마모토가 먼저 탱고를 시작했고, 2년 동안 파트너 없이 혼자 탱고를 배우다가 다나타를 만나 커플이 되었다고 했다.
"다나타가 잘 생겼잖아요. 다나타가 처음 밀롱가에 나타나자 어두운 지하 밀롱가에 태양이 비춘 것처럼 환해졌어요. 그리고 많은 여자들이 대시를 했어요. 하지만 결국 제 남자가 되었죠."
구마모토가 그렇게 그들의 지난 사랑 이야기를 정리했을 때 그녀는 마녀 같았다. 승리자의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다나타는 구마모토보다 무려 12년이나 연하였다. 구마모토의 나이를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뒷날 라우라가 설명해 준 바에 의하면 적어도 40대 초반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지 벌써 1년이 되었다. 라우라는 그들과 친구였다. 밀롱가에서 만나 친해졌다는데, 라우라에게 탱고 강습을 들으라고 셀마를 소개해 준 것도 구마모토 커플이었다.
탱고를 추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보다 실력이 좋은 파트너를 만나고 싶어한다. 특히 땅게라들은 리드가 정확하고 무게중심이 잘 잡혀 있는 땅게로를 찾는다. 탱고 에너지는 남자의 상체에서 시작해서 여자의 발끝에서 끝나기 때문에, 땅게로의 리드가 훌륭하지 않으면 어떤 좋은 땅게라도 빛을 볼 수 없다. 따라서 땅게라들은 자신보다 경력이 더 많은 땅게로를 찾는다. 셀마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승의 추천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평생 파트너가 아니라 2주동안 초보 땅게로와 한 팀이 되어서 잘 지도해 주라는 라우라의 말이 부담도 덜 되었을 것이다.
다다와 셀마는 언어 차이, 탱고 경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금방 친구가 되었다. 카페에서 탱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셀마가 말했다.
"탱고 한 곡 춰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