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가의 말표범, 바다표범? 맞습니다. 뭐 경우에 따라선 그렇게 표현할 수 있도록 보일 때도 있겠지요. 아이는 토끼, 강아지, 생쥐로 표현되고 아내는 여우, 호랑이…. 동물원에 온 기분이군요. 137 X 392 mm 종이, 연필, 먹, 수채 그림 김충순 http://www.minari56.com

파티를 하는동안 다다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먹어도 끝없이 배가 고플 때처럼, 그는 자신의 가슴 속에 거대한 동굴이 뚫린 것같은 알 수 없는 공허감을 느꼈다. 동굴의 높은 천정위로 박쥐가 날아다니고 뚝, 뚝, 천만년 된 뾰족한 종유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메아리치며 동굴 내부를 흔들었다.

라우라와 가르시아는 물론, 처음 만난 그들의 친구들까지 다다를 위해 즐겁게 술잔을 부딪치고 춤을 추었지만, 그래도 다다는 완전히 정신을 놓고 파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허전했다. 처음에 다다는 단순히 자신의 신경이 예민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라우라의 친구들이 라우라가 결혼할 때가 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정신적 허기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알았다.

초이였다.

파티에 초이가 빠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마음 속으로 초이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비로소 인정했다. 그때까지 그는 초이를 스스로 마음 밖으로 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초이라는 이름은 물론, 초이에 대한 이야기까지 일부러 꺼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다다의 마음 속에 이미 초이가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당연히 라우라와 가르시아가 주최하는 파티라면 초이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초이는 파티가 거의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갈증 속에서 초이를 기다렸다. 그 갈증이 동굴을 만들고 동굴의 천정 위를 박쥐가날아다니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라우라에게 왜 초이가 오지 않는지 물어보기는 싫었다. 라우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초이가 등장한 것은 파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초이는 마치 마법의 램프에서 튀어나온 요술공주처럼 갑자기 다다 앞에 서 있었다. 다다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인사말이 사실은 정말 반가운 뜻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다다는 이해했다. 초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식으로 베소를 했다. 다다의 뺨에 초이의 빰이 닿았다. 차가웠다. 그 뺨에는 도로 위를 삐르게 질주하는 경적소리와 매연과 먼지와 밤거리의 골목을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묻어 있었다. 다다는 순간, 초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뜨거운 혀와 혀가 만나고, 서로의 침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짙은 키스를 백년동안 하고 싶었다.

"파티 다 끝났니?"

다다와 초이의 곁으로 라우라가 다가왔다. 한 손에 투명한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와인잔을 손가락 사이로 빙글빙글 돌렸다. 라우라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올라가 있었다. 다다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녀는 와인을 마셨고 마셨으며 또 마셨다. 명절날 풀 먹인 어머니의 옥양목 버선처럼 신체의 바깥에 날카롭게 흐르던 선은, 어느새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다다는 초이를 바라보았다. 검정색 원피스였다. 어깨에는 가느다란 선만 걸쳐져 있고 커다란 가슴과 깊게 패인 가슴 사이의 골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드레스였다. 뒷 부분은 엉덩이까지 패인 과감한 디자인이었다. 그녀가 힙을 흔들며 걸어갈 때 어쩌면 엉덩이 사이의 골까지 보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다른 파티에 다녀온 것이다. 다른 파티 참석 때문에 초이가 늦는다는 말을 라우라는 다다에게 한 번 쯤 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라우라는 일부러 초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다에게 꺼내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절대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굳이 다다가 알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뇨,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살짝 빠져나온 거에요. 언니.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더 일찍 나오려고 했었는데, 다다, 미안해요."

초이가 라우라를 보고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자 다다는 깜짝 놀랐다. 초이 보다는 라우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킨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아, 아뇨, 전 괜찮습니다. 재미있었는데요."

"제가 없어서 재미있었다는 것인가요?"

초이는 한 번 표적을 정하면 끝까지 달려가서 기어코 먹이를 물고 마는 치타처럼 다다의 말을 물고 늘어졌다. 다다는 당황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제가 없어서, 덜 재미있었다는 건가요?"

초이는 재미있다는 듯이 아예 팔짱을 끼고 다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라우라는 다시 한 번 와인잔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리고 다다의 말을 가로막고 대신 초이에게 말했다.

"그런가 보지 뭐. 김선생님 아까부터 널 기다리시는 눈치던데. 어쩐지 자꾸 문 입구 쪽을 바라보시더라구."
"어머 그래요? 영광인데요. 다다, 정말이에요?"

초이의 얼굴이 금방 환하게 밝아졌다. 입끝이 초승달처럼 양쪽 귀 가까이까지 올라가며 웃었다. 그러나 라우라의 얼굴은 초이가 밝아질수록 어두워졌다. 초이의 목소리가 경쾌해질수록 라우라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다는 두 여자 사이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문풍지처럼 부르르 떨었다.

"그만해라. 김선생님 그러다 쓰러질지도 모른다."

"어머, 설마요. 저렇게 튼튼한 허벅지를 가지신 분이 저의 가냘픈 농담에 쓰러질 리가 있겠어요? 안그래요 언니?"

초이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다다의 하체를 향했다. 라우라의 시선도 슬쩍 다다의 하체로 내려갔다. 다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두 여자가 동시에 자신의 하체를 바라보며 농담을 던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이 난처한 상황을 빠져나가야할지 몰랐다. 구세주는 라우라였다.

"늦게 와서 변명할 말이 없으니까 괜히 김선생님 물고 늘어지네. 와인이나 한 잔 하자."

라우라가 테이블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등 뒤에서 남극의 차가운 얼음이 느껴졌다. 라우라가 등을 돌리자 초이는 얼른 다다에게 팔짱을 꼈다.

아르헨티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우스와이니아라는 도시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다. 아르헨티나와 남극반도 사이에 있는 드라케 해협은 바다가 거칠기로 유명하다. 길이 4미터 무게 450킬로그램의 거구인 얼룩바다표범들이 물속을 헤엄쳐다닌다. 그 앞에서는 인간은 종이인형처럼 왜소한 존재에 불과하다. 다다는 마치 남극의 차가운 바다에서 얼룩바다표범을 만난 것 같았다.

카페를 나오기전, 다다는 초이와 탱고를 추었다. 가르시아가 오늘 파티의 마지막 음악이라면서 탱고를 틀었다. 바호폰도 탱고클럽의 음악이었다. 초이는 다다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이미 그 전에 다녀온 파티에서 술을 마신 상태였고, 카페에 도착해서도 라우라의 친구들과는 이미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함께 와인을 몇 잔 더 마셨다. 완전히 취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보통 때와는 많이 달랐다.

"저는 아직 탱고 못추는데요."

"이제 배우실 거잖아요. 미리 예습해봐요. 착한 학생들은 학교가기 전에 반드시 예습을 하는 것이라구요."
"전 착한 학생이 아닙니다."

"전 나쁜 남자를 좋아해요. 저도 언니한테 탱고 배우는 것 아시잖아요. 이제 내일부터 우리는 한 배를 탄 동지라구요. 즉, 우리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초이는 '한몸'에 힘을 주었다. 그렇다. 이제 내일부터 탱고레슨이 시작된다. 다다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체류할 수 있는 최대시간은 2주였다. 그동안 최피디는 촬영한 테이프들을 편집해서 완성본을 만들고 작가는 영상에 맞춰서 나레이션 원고를 써놓을 것이다. 방송 직전 서울에 도착해서 나레이션을 녹음한다고 해도 다다에게 주어진 시간은 최대 2주에 불과했다. 그동안 그는 탱고의 기초를 튼튼히 배워야 한다. 물론 선생님은 라우라였다.

초이와의 첫 번째 탱고는 엉망이었다. 다다는 초이의 등에 오른손을 대고 왼손으로는 초이의 오른손을 맞잡고 초이를 바라보며 마주섰다. 초이는 등이 완전히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있어서 다다의 손은 초이의 맨살위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다다의 손은 가볍게 떨렸다. 초이는 자신의 등에 닿는 다다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이 파르르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초이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다다는 수없이 초이의 발을 밟았다. 다다가 춤을 멈추려는 순간, 초이는 적극적으로 다다를 리드했다. 탱고에서의 남녀의 역할은 분리되어 있다. 음악을 듣고 방향을 정하는 것은 남자의 몫이다. 그러나 다다는 초이의 리드대로 따라갔다. 이렇게 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남극 바다 차가운 물속에서 헤엄치는 얼룩바다표범들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해줄까? 그는 뼛속까지 차가워질 수 있도록 남극의 바닷물 속에 몸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뜨겁게 달아오른 온몸의 피를 식히고 싶었다. 초이가 자신의 가슴을 다다의 가슴에 밀착시키며, 다다의 등을 단단하게 껴안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