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님 때부터 인천 내항에 인접한 중앙동과 송학동(현재)에서 거주하고 있는 필자는 인천의 누구보다도 내항과 인연이 깊고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구한말(舊韓末)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 광제호 함장이시던 할아버님(愼順晟)과 인천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인천 발전과 향토사 집필에 남다른 열정을 지니셨던 아버님(愼兌範)의 유지에 따라 인천을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시민들의 민원대상이 되어 버린 내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답답한 심경과 함께 인천을 떠나고 싶은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홉 살이 되던 1920년대 초 여름이라고 기억된다. 아버지께서 오늘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축항으로 향했다. 제1갑문 앞에 이르러 광제호 갑판 위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 아들이 축항에 나와 있는 것을 보시고 반갑기 보다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이 짙은 아버님에게 먼 절을 올리고 자랑스럽고 들뜬 기분으로 축항 안으로 들어오는 광제호를 눈여겨 지켜보았다"(愼兌範 저 '인천한세기'에서)
일제시대에도 어린 학생들까지 축항(내항) 출입이 가능했고 전국 각지에서 인천 항구 구경을 오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개방되어 친수공간 역할을 하던 내항은 어느 때부터인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이방 지대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공해 유발 원료(고철, 원목 등) 화물과 함께 대형 화물 트럭이 도심을 질주하는 무법천지가 된 것은 인천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었다.
중앙정부와 인천시가 야심찬 항만 재개발 사업을 구상하고 있음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개발업자의 이익보다는 공공 목적의 친수공원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면 한다. 뜻있는 시민들과 시민단체의 목소리와 참여가 절실한 시점이기도 하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