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저문다. 세밑(歲暮)의 노을이 점차 바래어 "고 있다. 다람뒤 쳇바퀴 돌듯한 바쁜 인생으로 하여금 더욱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계절이다.

 1999년의 마감은 동시에 20세기, 더 나아가서는 즈믄(1000)단위의 기원대(紀元代)를 돌리는 역사적 순간을 더불어 동반하고 있어 어설픈 망년회로 풀 수 없는 어려운 숙제를 안겨준다.

 언필칭 부여된 목숨을 통해 「두 천년」에 걸쳐 삶을 이어간다는 것은 좀처럼 누리기 힘든 행운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역사의 증인이라는 입장에서 옷깃을 여미게 한다.

 하기야 천년 세월의 엄청난 곡절을 짧은 세밑서 가려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자긍심만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흔히 하루 일과를 펴려면 아침에 계획을 짜야 하며, 한해를 차질없이 경영하자면 정초에 뜻을 세워야 때를 놓치지 않는다고 했다.(一日之計在晨 一年之計在春)

 바꾸어 말하면 내일의 예비는 전날 저녁의 "검에서 비롯되며 새해의 포부는 세밑의 반성을 통해 시행착오를 최소화 할 수 있다는 교훈으로 풀이된다.

 사리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요즘 세태(世態)는 새천년에 향하는 엄청난 기대에 비해 가는 천년에 대한 감회는 고사하고 묵은 한 해를 정리하고 내일에 대비하려는 관심과 노력조차 부족하다.

 이 경우 애써 과거를 외면하고 미래를 점치는 것은 결국 허물을 덮어 둔채 미래에 임하려는 졸속행위와 다름이 없다.

 물론 이러한 불신의 원인은 보기하면 우리가 겪은 사사건건에서 정치현안의 부재에 대한 실망이 컸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치인의 자질만을 성토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처사인가를 생각해 볼 때 이 기회에 깊은 성찰이 간구된다.

 항용 자신의 결함은 접어 둔채 매사가 「네탓」으로 돌리기 일쑤인 인간관계에서 사람은 권리만을 주장하는 개인이기에 앞서 국가의 일익을 담당할 국민이라는 긍지와 책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지금 온 세상이 새 천년의 꿈에 부풀어 있는 작금에, 유독 우리만이 답보상태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것은 감히 남의 탓만을 내세울 수 없는 바로 「제 탓」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최상의 미래를 여는 관건이다.

 무릇 역사란 무수한 계기(契機)를 통해 형성되는 과정이며 여기서 승자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 데서 탄생한다.

 오늘날 역사의 추이를 편의상 백년 단위로 끊어 한 세기를 설정하고 나아가서 천년을 고비로 대변화를 꾀하려는 것은 인간이 지닌 심리적 설정이나 다름이 없다.

 실상 1999년 12월31일 자정과 2000년 1월1일 자정사이에는 하등 연장선 이상의 제약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해 새 천년에 대한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심리적 계기를 통해 새로운 발상을 펴보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오늘을 정리함이 없이 내일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무엇인가 보다 발전적 계기(발판)를 펴고자 하는 과정에서 비록 노루꼬리 만큼밖에 남지 않은 이 해의 여백(餘白)에서나마 자기 성찰이 간구되는 까닭이 이에 있다 하겠다.

 여기서 잠시 사족(蛇足)을 붙이자면 나 개인 또한 변화가 없지 않았다.

 4년전 신병으로 단장(斷腸)의 아픔을 간직한 채 정든 이 고장을 떠나야 했고 이제 차도가 있어 지난 7일을 기해 계양(桂陽)땅에 다시 되돌아 온 것은 스스로 용기 있는 결단으로 치부하고 싶다.

 늦게나마 부평초(浮萍草)같은 내 인생에 비로소 인천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두게 된 작은 사건이었음을 부기하고자 한다.

 폐일언하고 사업의 수지를 따지는데 결산이 불"결한 것처럼 방금 역사의 회년(回年)을 눈 앞에 두고 이를 성찰할 마음의 「대차대조표」(貸借對照表)가 화급하다.

 스스로 결함을 불식함이 없이 새해에 이월(移越)하려는 것은 백년이 아니라 천년하청(千年河淸)에 비길 바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보다 밝은 내일을 위해 세모의 어두운 그림자를 서둘러 거두자는 것이다.